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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Dec 18. 2016

< 생 일 >

- 내가 태어났던 날 -

“아... 배가 왜 이러지... 아직 산달이 많이 남았는데......”


197X 년 12월의 어느 날, 어머니는 산통을 느끼셨다.

산달이 많이 남았던 터라 처음엔 보통의 복통인 줄 아시고 화장실을 가셨다고 한다.

그러다 이게 아니다 싶어 그 추운 겨울밤,  읍내 유일한 병원인 김 의원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셨다.


온몸이 식은땀에 흥건히 젖고 눈앞이 흐릿해지고서야 도착한 병원,

하지만 정작 아이 낳는 일은 수월하셨다.

아이가 너무 작았던 탓에 화장실에서 큰일 보는 느낌처럼 뭔가 한 덩어리 쑥 빠지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아이였단다.


흔히들 말하는 칠삭둥이...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일곱 달 만에 태어났다.


옆에 도와줄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 혼자 간신히 병원을 가시다 보니 출산 준비물을 챙겨갈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배냇저고리도 입지 못하고 병원 이불에 둘둘 싸인 체 있어야 했다.


달 수가 많이 모자랐기에 병원에선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기를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살기 힘들거라 했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 시댁에서 시집살이에 시달리다, 쌀 한 가마니만 짊어지고 막 읍내로 분가한  부모님 형편으로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결국 당직 중이던 아버지와 멀리 살던 친정어머니를 대신해 가까운 시골에 사시는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날 바로 어머니와 나는 시골로 내려왔다.


시골집 아랫목에 나를 뉘이고 천천히 뜯어보시는 어머니...

다른 아이들의 반 만한 아이는 배꼽만 겨우 곰살꼼살 움직이는 얕은 호흡으로 아직 살아있음을 알렸다.

축 쳐진 팔다리는 방바닥에 스며들 듯했고 깡마른 아이의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가늘디가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붙은 머리는 힘없이 가로 뉘어 있었다.

눈도 못 뜬 체, 뼈만 앙상한 아이...

그 아이의 귀는 유도나 레슬링 선수의 귀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뱃속에서 온전히 다 펴져서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그래서 아직도 내 귀의 윗 끝부분은 조금 눌린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사랑스러운 당신의 아기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작은 손에 절반 정도 들어오는 아이의 작은 이마를 쓸어 주셨다.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어머니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고였던 눈물들이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아가야...

널 건강하게 못 낳아줘서 미안하다...

엄마 뱃속이 편치 않아서 빨리 나왔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가야...”


지금까지도 내가 세상에 빨리 나온 이유가 엄마 뱃속이 편치 않아서였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자책은 현재 진행형이다.


부잣집 셋째 딸이었던 어머니는 흔히들 말하는 초강력 콩깍지가 씌어 가난한 시골 농군의 집 넷째 아들에게 시집을 가셨다.

결혼과 동시에 시골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가지셨다.


범 같은 시어머니, 6명의 시숙과 2명의 시누이가 있던 집의 세끼 식사와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셨고 거기에 생전 해본 적 없는 농사일까지 하자니 어머니는 점점 말라만 가셨다.


그러던 어느 여름, 한 번은 논에 농약(제초제)을 칠 일이 있었다고 한다.

날 임신한 채, 그 땡볕 내리쬐는 여름에 독한 농약 냄새를 맡고 있으니 뱃속의 아이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으셨더란다.

그러다 그 모습을 본 큰 고모님이 “야! 이 인정머리 없는 것들아! 아무리 그렇다고 애 가진 사람한테 약을 치라고 하냐!!!”라고 불호령을 내리셨고, 그렇게 나는 뱃속에서의 목숨줄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아... 이곳에선 이 사람이 살 수 없겠구나’ 싶어 결국 읍내로 분가하기로 결심하시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달랑 쌀 한 가마니만 가지고 어머니와 함께 읍내로 나오시게 된다.


나를 가지고 그런 힘든 일을 겪으셨기에 어머니는 조산한 이유를 자신의 탓이라 여기신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은 생각도 않은 체, 나만 생각하면 스스로 죄인이 되는 어머니...


가끔 TV에서 ‘미숙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니께선 “아이고, 그래도 저 애기는 크다. 넌 그때 꼭 쥐-새끼 같았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때의 내 모습을 회상하실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꼭 쥐-새끼 같았다'라는 표현을 하신다.

아마 유난히도 작고 연약했던 모습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랬다. 나는 너무나 불안하고 연약한 존재였다.

하루에도 고온이 오르고 내리길 여러 번이었고 창호지 발라진 시골집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겨울의 찬 기운에 딸꾹질과 경기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위해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얇은 이불을 여러 장 겹쳐 굴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안에 나를 조심히 눕히셨다.

이불 들썩임도 없는 여린 숨을 나는 그 굴속에서 이어갔다.


태어나자마자 ‘생과 사’라는 기로에 서있던 내가 살기 위해선 먹어야 했다. 그러나 젖을 빨 힘조차 없었던 나는 젖을 먹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커피 잔에 분유를 타 작은 커피 숟가락으로 아주 조금씩 입안으로 분유를 흘려 넣어주셨다.

그러면서 ‘아마 이 아이가 살기는 힘들겠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살 거란 희망을 갖기엔 눈앞에 놓인 아이는 겨우 숨 줄 만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낳자마자 잠시 분가했던 읍내에서 다시 시골로 내려온 어머니는 산후조리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장작으로 아궁이를 때던 시골 부엌으로 가보니 생미역만 가마솥 안에 있었다고 한다.

알아서 미역국을 끓여 먹으라는 시어머니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그 모습에 어머니는 눈물을 왈칵 쏟으셨다.

‘아... 이대로 굶어 죽을까...’ 싶었지만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 한다는 모성애와 배고픔이란 원초적 본능 때문에 출산한 그날, 아궁이에 장작을 떼 손수 미역국을 끓이셨다.


하지만 정작 서러운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어머니의 냉대와 괄시였다.


집과 집 사이의 담이랄 것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시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다 들으란 식으로

“우리 며느리는 희한한 애를 낳아브렀소!”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며 돌아다니셨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며느리의 ‘희한한 아이 출산’에 대해 남 이야기하듯 말하셨다.

또 새벽 일찍 일어나 저주하듯 며느리 욕을 해대며 신경질적으로 한겨울 마당에 물을 뿌리 시기도 했다.

아마 건강치 못한 아이를 생산한 며느리가 미워서였으리라......


197X 년 12월, 내가 태어난 그날 밤...

그날은 쓸쓸한 보름달이 밤하늘 가운데에 밝게 뜬 밤이었다.

어머니는 추운 12월의 겨울 하늘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우셨다.


오늘 혹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이에 대한 걱정.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아이에 대한 미안함.

가슴에 박혔던 시어머니의 말과 행동들.

이렇게 힘들 때마다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일찍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

또, 뜻 모를 서러움......

그런 것들이 겹쳐 울고 또 우셨다.


나를 낳고 시골에 있던 여드레 동안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못하셨다.

분가하기 전처럼 시어머니를 포함한 9명의 세끼 식사를 어머니 혼자 도맡아 하셔야 했고 빨래며 청소 등 온갖 집안일도 하셔야 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어머니가 힘든 티를 내면

“예전엔 애 놓고 바로 밭에 나가 일도 했다.”라는 시어머니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시어머니가 무서웠던 어머니는 그래서 힘든 티도 내지 못하고 묵묵히 일만 하셔야 했다.


그렇게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가 계속되던 어느 날, 하루는 장에 가신 시어머니가 장닭을 사 오셨다.

그리고 그 장닭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미역국을 끓이셨다.

‘아... 그래도 아이 낳았다고 미역국은 한 번 끓여 주시는구나’라고 어머니는 생각하셨다.

하지만 그 장닭은 첫째 아들의 몫이었고, 남은 국물 한 그릇만이 어머니에게 주어질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서럽고 힘들었다.


일은 일대로 많았고 먹는 것은 부실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코에 손을 대가며 숨이 멎었나 안 멎었나 확인해야 하는 아이 때문이라도 어머니는 시골집에서 나와야 했다.


“어머니. 저 저희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는 도저히 나를 살릴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선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무섭고 두렵기만 했던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통보식으로 뜻을 전했다.

그리고 강보에 나를 둘둘 싸맨 후 시골집을 나섰다.


그때가 크리스마스이브...

어머니는 작은 아이를 꼭 안은 채, 그렇게 시골 버스에 몸을 실으셨다.

그리고 읍내 사글셋방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 후 어머니는 오로지 나를 살리는 일에만 열중하셨다. 아니 살리는 것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보다 더 건강하게 키우는데 온 신경과 마음을 쏟으셨다.

그래서 그 가난한 살림에 슈퍼마켓에 외상까지 달아가며 가장 비싼 분유와 비오비타 그리고 영양제 등 그 당시 아이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이셨다.

하지만 그것은 남루한 살림에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상......

부잣집 셋째 딸이었던 어머니는 자존심이 쎄셨다.

그런 어머니가 분유 한통을 들고 처음으로 ‘외상’이란 말을 꺼내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힘겹게 숨줄을 붙들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그 딴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야......’

아이를 위해서 어머니는 강해져야 했다.


어머니는 매 순간 기도하셨다.

아이에게 젖을 떠먹일 때도, 아이의 기저귀를 빨 때도, 연탄불을 갈 때도, 아이의 잠든 모습을 보면서도... 심지어 자신의 꿈속에서조차 마치 주문을 외우 듯 “아가야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꼭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 자신과 갓난 아들에게 살 거란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 다짐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에 어머니는 덜컥 겁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달려가 아이의 코에 떨리는 손가락을 대보고는 미세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안도하셨다.

그리고 그런 안도감에 온몸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기가 여러 번 이셨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뼈만 앙상한 아이는 젖 한방을 떠넘기는 일에도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에 일그러지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셨다.

왠지 지금 아이 앞에서 울면 진짜 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입술과 어금니를 깨물며 참고 또 참으셨다.

하루하루가 슬픔의 연속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 때문이었을까?

모유면 모유, 분유면 분유, 거기에 영양제 등을 잘 먹었던 나는 점점 살이 붙어 ‘쥐-새끼’에서 ‘사람 새끼’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피부는 어머니를 닮아 하얗고 볼에도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그렇게 5개월여의 시간이 흘러 처음으로 다시 시골 시댁에 내려갔던 날.


5개월 만에 몰라보게 변한 손자의 모습에 시어머니는 “오매... 아기가 꼭 봉덕 각시(보기 좋게 통통한 여자아이나 아가씨) 마냥 하얗고 겁나게 이쁘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고, 다른 시댁 식구들도 건강해져서 돌아온 예쁜 조카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뿌듯함과 가슴 한켠의 시름을 조금은 놓으셨다.


모든 시댁 식구들이 쥐-새끼에서 사람새끼로 환골탈태한 아기를 구경하기에 정신이 없을 때 어머니는 조용히 혼자 방에서 빠져나오셨다.

그리고 활활 장작이 타는 부엌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우셨다.

그동안의 마음고생들이 조금은 풀리는 듯해서였을 것이다.


‘아가야... 고맙다.

살아줘서 고맙다.

그리고 널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세상에 나오자마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가야......’


어머니의 흐느낌은 장작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계속됐다.

.

.

.

지금도 TV나 라디오에서 달 수를 채우지 못한 아기들에 대한 사연이 나오면 어머니는 항상 “뱃속에 있을 때 네가 편치 않아서 세상에 빨리 나온 것 같다”며 자책하신다.     

자신이 겪어온 고통은 잊은 채 엄마 뱃속에서 편하게 있을 수 없어 내가 일찍 나왔다고만 생각하시는 어머니.


12월 17일...

약 40년 전 내가 태어난 날.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지켜봐 왔고

또 태어나서는 어머니를 눈물짓게 한 내가 태어난 날......


“엄마... 난 엄마 뱃속이 편치 않아서 빨리 나온 게 아니야.

엄마가 너무 슬퍼 보여서 빨리 나와 위로해 주려고 그런 건데, 그런 게 오히려 엄마를 슬프게 했네...

엄마... 내가 빨리 나와서 미안해...

그리고 나 살리고 키우느라 고생한 거 다 알아. 정말 고맙고......

엄마...     

아니     

어머니...     

어머니...

당신을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사진 : 구글 이미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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