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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의 사도 Oct 08. 2024

3부 12화)딸이 아빠를

아담과 현석은 깊은 수면에 빠져 자고 있었다. 된장국에 탄 수면제를 먹고 각자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밤 11시에 마을 입구에서 다미와 슬기, 박만호가 밤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만호는 슬기를 덮고 있는 얇은 담요를 정리해주며 춥지 않냐고 물었다. 슬기는 괜찮다면서 멀리서 보이는 승용차의 전조등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 차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차가운 밤공기의 두꺼운 밀도는 슬기의 마음 속까지 내려와 그녀를 짓눌렀다. 다미도 함께 간다는 아버지의 말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체 뭘 하는지 확인해봐야겠다는 다짐이 더 커졌고 역설적으로 그 다짐이 박만호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들 앞에 도착한 차에서 정장 입은 키 큰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는 다미에게 먼저 고개숙여 인사했고 아버지에게는 대충 목례만 했다. 예상치 못한 이 이상한 그림은 슬기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먼저 가세요.”

다미의 말에 박만호는 바보처럼 웃으며 자신의 차에 타 얼른 출발해버렸다. 딸 옆에 서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마음과 빨리 욕정을 풀고싶은 마음 반반이었다. 박만호 차의 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남은 3명은 계속 서있다가 이어서 곧 출발했다. 슬기는 세심한 주의력으로 그들이 언제 출발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체 다미랑 이 남자랑 무슨 관계인거야? 다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미가 가자니까 움직이고.. 그리고 다미는 아빠 차가 안보이기 시작할 때 가자고 했어. 함께 가자고 해놓고 왜? 아무래도 이건 이상해.’ 장애인 슬기를 뒷자리에 태워주고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서 트렁크에 넣을때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출발하려고 양복입은 사내가 기어를 D에 놓았을 때 다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A 말고, B로 가주세요.”

“네?”

“B요.”

“아.. 네.”

자신 옆에 앉아있는 다미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무서워진 슬기는 몇가지 물어보려던 것을 포기했다. 차 안의 3명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차는 몇 번 가로등을 만났지만 나중에는 가로등이 있는게 이상한 산길을 들어선 뒤 울퉁불퉁한 길을 가고 있었다. 슬기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그냥 멀미뿐이면 다행이였지만 마음은 더 불편했다. 혹시 자살클럽같은 것에 가입한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박만호가 몇 번 해봤다고 하는게 그것일리는 없었다. 

‘마약일까? 이 남자가 유통 조직원이고 다미가 VIP 고객? 아니야, 말도 안돼. 이 애가 돈이 어디있겠어.’ 

완벽한 오답노트만 머리 속에 작성하기를 한참, 이번엔 나름 포장된 도로가 나와 조금 편한 길이 나왔다. 그러다가 무슨 펜션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고 차는 거기서 그 간판이 가리키는 길로 들어섰고 차는 다시 뒤뚱거렸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죠.”

“네.”



이상하게 너무나 간단한 대화가 끝나고 차가 멈춰섰다. 운전자가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렸고 그 다음은 휠체어, 그 다음은 다미, 마지막으로 슬기가 내리고 세 명은 다시 추운 밤 산길을 걸었다. 계속 가다보니 빌라 두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의 펜션이 보였다. 펜션 앞에는 박만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또 다른 양복입은 남자가 있었다. 슬기는 점점 불안해졌고 저 건물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들어가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참혹한 것을 마주하든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처음부터 이 세계에 들어서면 안되었다. 슬기는 다중우주론을 떠올리며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엄마와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하거나, 하다못해 아버지의 말을 듣지 못한 자신으로 전환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올라야 할 계단 앞에서 휠체어에서 내려져 남자에게 업힌 다음 입구에서 다시 휠체어를 타는 동안 지연된 시간은 그녀의 긴장을 적당히 식게 해주었다.


 ‘제발, 아무 일도 아니기를.’ 이미 지옥은 한 번 경험했다. 또 다른 지옥이 존재하고 그것을 경험할 것이라는 걸 상상해봤지만 설마 운명이 그렇게 진저리 날 정도로 가혹할리가 없다 생각했다. 괜찮기를 바라며 괜찮다던 아버지의 말을 기억에서 꺼내며 밀어지고 있는 휠체어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급하게 청소한 티가 나는 조잡한 거실, 먼지와 함께 구석에 치워진 가구, 유일하게 새상품에 깨끗한 매트릭스, 아버지, 처음 보는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여자. 매트릭스 주변에 옷들. 더없이 비참한 것은 두 사람이 나체였다는 것이었다.



“스... 슬기야. 아.. 안다미! 너 왜 여기로 왔어!”

만호는 옷을 얼른 주워 주요부위를 가린 다음 다시 떨어뜨리더니 바지부터 얼른 입고 그 다음 상의를 입었다. 그 틈에 여자아이는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안다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갸우뚱하게 기울이더니 눈짓으로 만호에게 슬기를 가리켰다. 슬기의 눈에 증오와 원망이 가득차있었다. 몸만 움직일 수 있었으면 곧바로 달려들어 칼을 가슴에 꽂을 것 같은 경멸의 눈빛이었다.

“슬기야. 아빠 말 좀 들어봐.”

지체장애인은 상체를 벌벌 떨며 눈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녀의 아빠는 뭔가 말할 것처럼 말해놓고 정작 아무 말도 못하고 손만 앞에 내밀고 있었다. 두 부녀 사이의 5m 거리는 멀어지지도 좁혀지지도 않았다.

“더러워...”

“슬기야. 아빠가...”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슬기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소리 질러댔고 만호는 입맛만 다시며 말할 듯 말듯 움찔움찔거렸다.

“그 날 엄마가 운전했으면 당신이 죽었을텐데. 그랬어야했는데!”


슬기는 조수석에 앉은 자신의 어머니와 그 뒤에 탄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역주행하는 차를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던 박만호를.

엄청나게 큰 울부짖음은 조직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때 다행히도 다미가 나가라는 손짓을 했고 조직원은 순간의 기쁨반 구경거리를 놓친 아쉬움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가려고 돌아설 때 다미의 손짓으로 다미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나서.



“슬기야. 아빠도 많이 힘들었어. 엄마랑 너랑 함께 즐겁게 살았으면 아빠도 이러지 않았을거야.”

“더러운 입으로 엄마 이야기 하지마.”

“아빠를 좀 이해해줘. 아빠에게도 공감해주라고.” 만호도 눈물을 흘리며 울먹거렸다. “너 없는데서 아삐도 많이 울었어. 얼마나 네 엄마를 그리워했는데. 너 모르게 차에서 울고 너랑 밥먹다가도 눈물 날 것 같으면 화장실 가서 울고. 아빠도 그 날 뒤로 반쯤 미쳐있었어.”

“알고있었어. 그래봤자 그건 이유가 안돼. 당신은 짐승이야. 더러운 짐승. 살 가치가 없는 짐승.” 비교적 차분해진 슬기가 입을 파르르 떨며 조용히 말했다. 

“왜 내가 짐승이 되었냐고!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었어!”

“그럼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어!”

“그런 생각 안해본 것 같아? 내가 죽으면, 너는? 너를 누가 키우냐?”

“키워달라고 한 적 없어. 이런 인간인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죽어버렸을거야.”

“너 어떻게 아빠한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니? 내가 널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박만호도 이제 화를 내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슬기는 더 이상 마주보는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가슴에서 떠올라오는 말들은 욕들 뿐이었다.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서 깨고 싶은 악몽이었다. 그 때 그녀의 왼쪽 어깨에 부드러운 손이 하나 올라왔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에는 손목이 올라왔다. 


그 손목은 점점 내려와 쇄골과 가슴을 타고 내려오더니 그녀의 시선 밑에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총이였다.




“살려둘 필요가 있겠어? 반성이라곤 하나도 없고 핑계뿐인 저런 인간을.”

부드럽고 흔들림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오른쪽 귀에 들렸다. 슬기는 홀린 듯 총을 손에 쥐었다.

“뭐, 뭐하는거야? 슬기야. 총 내려놔. 위험해.”

“다시 시작하는거야, 언니. 내가 도와줄게.” 다미는 슬기의 귓볼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내가 도와줄게.”

슬기는 총을 들고 아비를 향해 겨누었다.

“다시 시작하는거야. 새로운 인생은 밝을거야.”

‘거짓말, 밝을리 없어.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 이제 다 끝이야.’


박슬기는 박만호에게 총을 쐈고 피흘려 쓰러지는 만호를 보며 이번에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겨누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아까의 부드러운 손이 총을 뺏어버렸다. 다미는 배에 총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만호 옆을 지나 방에 들어갔다. 급소를 맞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응급사태도 없는 지금 곧 과다출혈로 죽을게 분명하다는 것을 느낀 만호는 최대한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참으며 사랑하는 딸을 쳐다봤다.


“괜찮아... 슬기야. 아빠는 이해해... 그리고 절대... 절대...”


만호는 점점 눈꺼풀이 감기고 차가워지던 몸의 신경이 느껴지지 않음을 느꼈다. 다행히 딸은 아까의 증오보다는 후회와 슬픔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는 것 같기도 한데 잘 들리지 않았다.


“절대... 다미 말을... 들으면 안돼... 저 여자애는...”

누구나 세상과 이별한다. 마지막의 한 순간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는 법인데 그 순간을 아는 사람에게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선택의 운명을 심사숙고해야하는 법이다. 만호는 사람이 원래 수시로 눈을 깜빡이고 산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했다.

“인간이 아니야...”




박만호가 총을 맞은 이후 하는 말은 슬기에게 들리지 않았고 박만호는 자식의 손에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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