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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의 사도 Sep 07. 2024

2부 2화)하얀 도화지

자신의 인생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모두 드러날지는 모를 일이다. 

음침한 길을 빠져 나오면 거대한 쇼핑몰과 작은 상가들의 간판들이 똑같은 정도로 비추는 빛이 유리의 마음을 상쾌하게했다.

 

유리는 감정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어두운 공간과 밝은 공간을 왔다갔다하며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환경에 너무 쉽게 좌지우지된다. 밝냐 어둡냐에 따라서도 사람 기분이 이렇게 바뀌는데 변덕스럽게 변하는 감정에 자신을 맡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아담에 대한 사랑은 어떤 소리, 어떤 공간, 어떤 처지에서도 변하지 않고 강렬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도 별것아닌게 되버릴까? 내 변덕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튀어나와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그땐 땅을 치고 후회하고 사랑했던 남자를 증오하고 자신에게 한숨쉬게 될까?’

이제 유리는 그 운명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는 사무실로 향했다. 운행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멀리서 눈인사하고 구취나는 계단길을 올라 4층에 들어선 뒤 딱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담배피는 문지기 역할 대머리 남자가 자신을 음흉한 눈으로 째려봤다. 

“눈깔 치워.”



문을 열자 맥주가 5분의 1쯤 남아있는 맥주병들과 담배 재떨이가 공간을 천박하게 만들었다. 잠옷인지 원피

스인지 구분하기 힘든 옷을 걸친 뚱뚱한 여자와 사장이 자신을 쳐다봤다. 사장은 먼지 묻은 양복을 털더니 다리를 책상에 올리고 불도 붙어있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는 지갑에서 21만원을 꺼내 책상에 올려놨다. 

“근무시간 아니냐?”

“할 말 있어요.”

“요새는 을질이 대세라더니. 사장 앞에서 할 말 있다고 기어 올라오네.”

“저 그만 일할래요.”

“뭐?”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봐요? 난 인간들 그런 말습관이 정말 싫더라.”




사장은 입에 물던 담배를 뱉고 다리도 내리고 얼굴을 길게 빼고 어이없다는 시늉을 했다.

“뭘 그만 둬? 누가 너 받아준다든? 어디 놈들이야?”

“이런 일 그만한다고요.”



“남자네, 남자. 딱 보면 알지.”

뚱뚱한 여자가 맥주잔을 흔들며 말했다. 유리는 움찔한 마음에 나가라고 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힘이 있으면 지금으로선 아껴놓는게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부터 안나올게요. 그런 줄 알아요.”

“해고통보가 아니라 사직통보네. 진짜 요즘 것들...”

“알았냐고요? 가면 돼요?” 

“너 빚이 얼마인줄 아냐?”

“말해요. 바로 계좌 넣어줄테니까.”

“뭘 계좌야. 현금으로 가져와야지. 장난치냐, 나한테?”

“알았어요. 얼마냐고요?”

남자는 유리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 뒤 장부를 꺼내 뒤적거렸다. 뚱뚱한 여자가 옆에 와서 장부를 슬쩍슬쩍 쳐다봤다. 보기는 하는건지 봤다안봤다거리며 혼자 궁시렁거렸다. 사장은 그녀에게 닥치라고 화냈고 여자는 짜증내며 바닥에 찌그러진채 눕혀있는 캔맥주를 발로 차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유리와 마주친 그녀는 최대한 고개를 뒤로 젖혀 유리를 내려보았다. 유리는 그 노력이 웃겨서 비웃어했다. 여자는 화났지만 뭐라고 화내야될지 몰랐다. 그런 자신에게 또 화가 났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남자 때문이면 후회한다.”

유리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다가 괜히 사장에게 아직 멀었냐며 소리쳤다.

“남자 믿는거 아니야. 너는 네 몸이 더럽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깨끗해지고 싶은 모양인데. 남자들 속이 더 더러워. 가장 착한 남자의 속이 가장 더러운 년 몸보다 지저분해. 여자따위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돼있지.”

“안물어봤어요. 좀 닥쳐.”

승기를 잡은 뚱보가 계속 말했다.

“나중에 피눈물 흘려봐야 널 다시 받아줄 곳은 이런 곳 밖에 없어.”

유리는 콧방귀 뀌며 영혼의 힘을 다해 무시했다.

“야, 찾았다. 4천만원.”

장부가 책상에 던져졌고 유리는 장부를 확인했다. 가게에서 준 돈과 자신이 갚은 돈을 깎아가며 한 번 더 계산해봤다.


“3천만원인 것 같은데요.”

“이자 모르냐. 3분의 1. 너 대신할 여자 소개값 안받은걸 고맙게 생각해.”

“하...”

유리는 깊은 탄식을 자신에게, 그리고 사장에게 내뱉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목과 가슴에 삼켰다.



처음 자신의 인생을 매춘에 던졌을 때는 먹고 살기 위해 던졌고 이제는 인생의 행복을 위해 사랑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천만원을 아까워 하기에는 인생 전체가 걸려있었다. 내일 가져온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더러운 자신과 사무실에게 마음의 작별을 하며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갔다.


"여긴 안돌아오겠네. 하지만 분명 자신을 저주하게 될거야."

뚱보가 코를 파며 지루한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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