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이야기
몸이 회복의 추세를 보이고 있어 원래 계획된 대로 수술 후 한 달 뒤쯤으로 퇴원날짜가 정해졌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이유들로 이제부터는 집으로 가서 회복을 해나가기로 했다.
재활병원을 가는 것보다는 집이라는 공간에 얼른 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어찌 됐던 집으로 일단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아직 움직임에는 제한이 많았지만, 심장 이식 결과에서 이상이 보이지는 않아 집으로 가서 외래를 다니며 추후를 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막상 퇴원이 한 주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상태로 집으로 가서 제대로 생활할 수 있을까,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는데 집을 가면 재활을 잘할 수 있을까, 화장실은 언제쯤 혼자 갈 수 있을까,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집에서 움직일 때는 휠체어를 타야 하나 등등 집에서의 생활을 상상해 볼 때면 고민거리는 하나씩 계속 늘어갔다.
물론 기대와 설렘도 있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니. 내가 다시 나의 공간인 집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생겼다.
그동안 집에서는 대대적인 대청소가 이루어졌는데,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친정 부모님과 동생들이 집 정리를 도와주었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의 청결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여러 짐들과 먼지가 날 수 있는 모든 옷, 이불류 등을 빨래 및 정리하고 청소 업체를 통해 집을 대대적으로 청소해 주셨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퇴원하기 전에 집 정리 마무리와 필요한 서류, 처리해야 할 행정 처리 등을 위해 남편이 며칠 동안 집에 다녀와야 했다. 내가 퇴원한 후에는 보호자가 없이 잠시도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래서 상의 끝에 퇴원 전 일주일은 엄마가 보호자로 와 계시기로 했다. 나와 남편은 엄마가 일주일 동안 병원에서 고생하실까 봐 우려했었지만, 결론적으로 나에게는 의미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중환자실에 머물렀던 모든 시간 동안 엄마는 함께 서울에 머무르며 매일 병원에 와서 기도를 하고 남편과 함께 식사도 하며 함께 해주셨었다. 그런데 면회는 주 보호자 한 명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와는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면회 시간 문 밖에 엄마가 항상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보고 싶었다. 이 일주일 동안은 엄마와 쉴 틈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몽땅.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족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또 퇴원을 하면 한동안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시간이었다.
퇴원날.
전날 올라온 남편과 함께 병원에서 퇴원을 준비하고, 당일 아침에 피검사를 한 내용을 토대로 약을 처방받아 퇴원 수속을 진행했다. 퇴원 날짜 결정 후에는 매일이 걱정 반 설렘 반이었는데, 막상 퇴원날이 되니 이상하게 눈치도 없이 설렘만 한가득이었다. 웃음이 계속 나왔다. 병원 생활 뒤 퇴원을 할 때 보통 환자들은 설레어하고, 보호자들은 걱정을 더 많이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다.
나도 환자가 처음이었지만 남편에게는 간병이 처음이었고,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간병한다는 것에 대한 예고편을 병원에서 보고 느꼈던 남편은 아마 마음의 준비가 아주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중에 얘기해 보니 남편은 퇴원할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그보다 걱정이 더 많았다고 한다.
병원과 집은 차로 약 4시간 정도 걸리는 아주 긴 거리였기 때문에, 나와 남편, 엄마 모두 긴장하며 집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수술 후 첫 긴 이동은 몸에 큰 무리를 주지는 않았고, 집 도착까지의 긴 여정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날은 집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갔던 날부터 퇴원하는 날까지의 긴 여정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돌리다 잠에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