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리뷰
수레바퀴 아래서
줄거리
작은 마을의 평범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특별한 소년 한스 기벤라트.
그는 천재라는 칭송을 받으며, 남들이 우러러보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불안하고 초조한 경쟁은 계속되고.
그 와중에 만난 별난 친구 하일너.
한스는 하일너와 우정을 쌓아가며 점점 변해가는데...
나는 차라리 그가 자살했길 바란다
숨은 의미 찾기
모든 사람이 그럴 리도 없고, '지나치다'는 기준 역시 모호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여기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관심을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지나친 관심을 준 어른들이라는 점. 그들은 아이의 시각에서 아이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어른의 시선을 아이들을 바라본다.
잘한다. 똑똑하다. 이것도 할 줄 아네?
아이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칭찬이 바로, 지능과 결과에 대한 칭찬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어른의 칭찬'을 강요한다. '천재, 최고, 1등' 어른들은 자신의 바람을 아이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어른에게 관심받는 것만의 세상의 목표인 아이들은 불쌍하게도 그것에 익숙해진다. 점점 어른에게 물들어간다.
여기에서 '기형적'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집고 가야 할 듯하다. 이 글에서의 '기형'이란, 실패하고 실수했을 때 좌절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합리화를 하는 등의 결과까지 초래한다. 이 모든 기형의 원인이 어른에게 있다.
한스 기벤라트 역시 '기형적'으로 자란 아이다.
아무리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지만, 이건 과한 욕심과 기대가 담긴 관심이다. 한스에게 기대를 거는 어른들은 모두 조건을 내세운다. 한스가 '주 시험에 합격'해, '신학교에 입학'해야만 자신의 관심과 기대가 가치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한스는 짐을 한가득 이고 살아간다.
"그러다 혹시 떨어지면, " 한스가 소심하게 말했다.
"떨어진다고?!" 목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멈춰 섰다.
"말도 안 돼. 떨어진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은 하지도 마라!"
p.18
불합리하기 그지없다. 한스는 계속해서 어른들의 기대처럼 일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한다. 그리고는 고통받는다.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시험에 합격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하다. 결국 방학 내내 쉬기보다는 공부를 택한다.
이렇듯 한스와 같이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더도 덜도 말고 딱 기형적으로' 자란 부류가 있는가 하면, 어른들이 질색하는 부류가 또 있다. 바로 하일너다. 사실 하일너라고 완벽한 이상향은 아니다. 다만 어른들이 바라는 기형적인 인간상으로 자라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는 점에서는 한스보다 강인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수많은 한스들에게 모두 자살을 권하는 것은 절대, 절대 아니다. 그게 사고였다면 누구라도 한스를 구했을 것이고, 자살이었다면 한스를 말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어버린 그에게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도 한스가 원했던 것이었길 바라는 일뿐이다. 만약, 남은 여정을 보낼 의지가 있었음에도 사고로 죽어버린 거라면 한스가 살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이룰 기회조차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젊은 청춘이 죽었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이 자살이길 바라는 일뿐이라니.
정말 비극적인 것은 죽은 한스를 보고도 변화하지 않는 사회와 사람들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한스들이 죽어나간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식고 딱딱하게 굳는다면 그게 죽음이라고 규정할 수 없을까? 그들에게 있어 심장은 생명유지의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더 이상 한스들을 죽일 수 없다, 죽여선 안 된다.
한스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한스가 아닌 어른들이 고민해야만 한다.
나는 살아남은 한스다
감상문
어릴 적의 나는 천재였다. 난 빨리 말하고, 잘 읽었다.
어른들에겐 '빨리'와 '잘'이 매우 중요하다.
어른들은 나를 반항하지 못하는 아이로 길렀다. 동시에 모범생으로 키웠다. 덕분에 나는 꼼짝없이 어른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탄탄대로를 걸을 팔자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하일너가 되었다. 거기에는 어른들이 더 이상 내게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빴다는 전제가 존재하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나는 한스로 살 팔자가 아니었는가 보다.
한스로 사는 동안 그리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막상 한스로 사는 것에서 벗어나고 나니, 그 삶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것 같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한스로 사는 동안에는 미처 보지 못한 것들, 미처 느끼지 못한 것들이 보이고 느껴진다. 아마 이걸 모르고 살았으면 억울했을 것 같다.
내 주변에도 한스가 많았다. 그렇게 사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스는 살아있다. 어른들이 바라던 모습대로는 아니지만 살아있다는 게 더 중요한 문제 아니겠나? 어른들도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으면서, 아이에게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폭력이다.
한스를 한스 그 자체로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고, 내버려 둬라.
그게 죽은 한스를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 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