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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전업작가 생존기

by 담작가

남자친구는 책이 든 묵직한 박스를 발로 치우며 꽉 막힌 거실에 길을 뚫었다.

"큰 짐만 대충 치우고
책상 위치만 잡으면 될 것 같은데?"


그 뒤를 지나가며 슬쩍 박스를 밀어보았지만 턱도 없었다. 나도 힘깨나 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있으니 내가 도움을 청할 일이 훨씬 많았다. 그는 무거운 짐도 딱 호흡 세 번만에 번쩍 들었고, 잔짐들은 슥슥 밀고 다녔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고 마음 속으로 나 혼자 '룸메이트로 합격이군'하고 생각했다.




이 작업실은 나 혼자 쓰는 게 아니라, 남자친구와 사용하는 공동 작업실이다.

푹신한 소파와 포근한 매트, 널찍한 텔레비전이 있어야 할 거실에 작업용 책상만 두 개나 놓인 이유다.

"결혼하려고?"

남자친구와는 10년 가까이 사귀었기 때문에 우리가 같이 산다고 했을 때 대부분 이런 반응이었다. 우리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여긴 작업실에 가깝다고 설명하곤 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와 나는 사귀는 내내 함께 글을 쓰고 읽고 보여주고 피드백했던 파트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내가 도서관 계약직이 끝나는 시기에 비슷하게 회사를 그만뒀다. 멀쩡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던 터라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고 싶은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고 계획대로 퇴사한 것 뿐이다. 우리는 둘 다 백수가 된 후, 함께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만 말하면 연인 관계가 아니라 비즈니스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당연히 그건 아니다. 우리가 생계 때문에 눈물 머금고 일을 다니는 동안에도 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주고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때론 따스하게 위로하고, 때론 따끔하게 조언하면서 우리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구보다 나를 오래 봐온 그는 나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가능한 비평가인 동시에 부족한 점을 채워줄 파트너다. 하지만...


"거 봐! 내가 안 들어간다고 했지!"

가끔은 이렇게 말 안 듣고 나한테 잔소리를 듣기도 한다. 새 작업실로 이사오면서 남친은 한쪽 벽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책꽂이를 처분했다. 문제라면 그 안에 꽂혀있던 책은 단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몽땅 들고왔다는 점이었다. 큰 책꽂이를 버리는 대신 새로 산 책상용 책장은 턱없이 작았다. 내가 분명 다 안 들어간다고 말했건만, 다 들어간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남친은 남은 책을 말없이 내게 슥 밀어주었다.

어떡하냐고? 어쩔 수 없지.
내 책장에 자리를 빌려주는 수 밖에...

커다란 책장이 붙어있는 책상을 새로 산 나는 마침 자리가 남았다. 책이 남아도 하나도 안 꽂아줄거라던 나는 결국 책장 한 켠을 내주었다. 내 끝없는 잔소리에도 그는 알았어, 알았어, 들은 채 만 채였다. 책이 들어있던 박스까지 치우고 나서야 거실은 깔끔해졌다.


책장을 공유하고 나니 정말 여기가 우리의 공동 작업실이라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좋든 싫든 함께 험난한 작가로서의 길을 헤쳐나갈 동료가 된 것이다. 인터넷 선 때문에 마주보고 앉지 못해서 설렘은 덜하지만,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그의 넓은 등판을 보고 있으니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나의 룸메이트,
지난 10년만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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