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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Jan 01. 2024

마주하다

자서전 8

곤두선 감각들이 어둠 속에서 글자를 만졌다.

어두워질수록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발 끝이 바닥에 닿았다.


성의 가장 아래층에 도달했다.

화사한 색깔도, 찬란한 장식도 없는

작고 초라한 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을 휘어잡을 위엄도, 눈을 사로잡을 매력도 없이

덩그러니.

아래층에 방이라곤 그거 하나뿐이었다.


문을 열면 뒤틀린 글자뭉치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두컴컴한 이야기의 밑바닥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겁이 났다.

이런 문을, 이런 방을, 이런 이야기를.

과연 누가 사랑하기나 할는지.

주먹을 꽉 쥐고, 문을 열었다.


예리한 글자 조각들이 볼을 스쳤다.

저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 보았다.

결정, 얼음처럼 단단한 글자의 결정들.

수많은 결정이 모여 방을 꽉 채운, 아름다운 한 덩이의 보석.

살갗이 아리도록 시린 글자들이 희멀겋게 어둠을 비추었다.

내가 마주한 보석은 그동안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전부 내가 만든 글자였다.


깊은 물속에 고요히 가라앉아 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내가 문을 열어주자, 글자들이 덩굴처럼 이야기 성의 기둥을 타고 올랐다.

소박하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만든 이 글자의 세계를, 나는 사랑하는구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나만큼은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럼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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