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교수, 경제학자, 정치가, 사회사상가. 다트머스 대학, 옥스퍼드 대학, 예일대 로스쿨을 거치면서 경제학, 정치학, 철학, 법학을 공부하고, 정부기관과 대학에서 일했다. 클린턴, 힐러리와 예일대 동기였다고 한다. 클린턴 정부 1기 때 4년간 노동부 장관을 했는데, 경제 정책 기조가 신념과 맞지 않아서 사퇴하였다.
클린턴 대통령 재임기간(1993~2001년)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경제 호황기였다.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미국 기업들이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커졌다. 그런데 성공의 과실이 대주주와 극소수의 최고경영진에게 독점되었다. 경기가 좋다는데 생활은 어렵다니, 뭐지? 어리둥절해진 사람들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세금 포함 정책들이 거대기업과 대주주 편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금융 규제가 풀리면서 미국의 산업이 금융중심으로 변한 시점이기도 했다. 1930년 대공황의 교훈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은행이 자기가 투자한 회사에 무리한 대출을 하다가 도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1933년에 만든 이 법안의 폐지에 1999년 클린턴이 서명했다. 같은 해 파생상품 규제방안을 만든 브룩슬리 본 상품거래위원장은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못해서 사퇴하기도 했다. 라이시씨가 퇴임한 것도 월스트리트 출신 관료들 사이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한 퇴임사가 유튜브에 있다.
a warning of a two-tiered society(양극화 사회 경고)
"이런 식으로 경제가 양극화되면,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사회 분위기까지 다 망쳐진다. 야망 보다 질투, 인내 보다 증오에 압도당한 대중들은 처음에는 이민자나 싱글맘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 서로 뜯고 싸울 것이다! 다음 공격 대상은 바로 ‘너’일지도."
대학으로 돌아간 라이시씨는 국가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최상위층은 ‘자유 시장’,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경제학 용어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시간을 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시장’은 사람들이 룰을 정함으로써 만들어진 인공 생태계이다. 파이를 만드는 룰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전체 크기 뿐 아니라 누가 먹을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의 ‘다수’에게 좋은 룰들이 있을 것이다. 라이시씨에 따르면, 대주주 과세, 금융 거래 과세, 월스트리트 거대 은행 규제, 불법 정치자금 차단, 국방 예산 삭감, 교육과 사회기반시설 투자 등이다. 그런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책 결정권자들은 이런 결정을 하지 않는다. 백악관과 국회는 거대기업과 금융업자들이 고용한 로비스트들에 둘러쌓인 채 그들에게 고용된 전문가들의 논리를 받아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 심해지다가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졌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집값 상승기에 저신용자한테까지 소위 서브프라임 등급의 대출을 마구 해주다가, 집값이 떨어지면서 채무불이행이 대거 발생해서 금융기관들이 연쇄 파산한 사건'인데, 이 일이 은행과 채무자 간의 대출 관계만으로 생긴 것은 결코 아니다.
은행이 실행할 수 있는 대출의 총량은 예금보유고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이 시점이 되면 집값 상승이 멈추고, 굳이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살 필요도 없어지는 쪽으로 싸이클이 바뀌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은행은 다른 수익처가 없어서 아쉽고, 사람들은 집값 상승에 올라타고 싶어한다. 투기적 금융자본은 이때를 기회로 본다.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증권을 만들게 했다. 은행은 그 증권을 판 돈으로 신규 대출을 하고, 새로 생긴 대출채권으로 또 증권을 만든다. 이것을 반복한다. 그렇게 많은 대출채권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CDO라는 증권은 담보된 부동산의 지역이 다양하고, 채무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일부가 돈을 갚지 못하더라도 손해가 분산되는 저위험, 고수익 투자상품으로 알려졌다.
신종 금융상품을 혁신으로 포장해서 세계로 법인 영업을 다니고 정부 관계자들을 구워 삶은 것이야말로 최상위 포식자들의 특기이다. 외국 금융기관들까지 투자에 가세하자, 은행은 증권을 만들기 위해 서브프라임 대출을 닥치는 대로 했다. 감독기관들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집값이 계속 오르니까 일단 대출을 받아서 집을 샀다. 당연히 더 이상 대출을 해 줄 사람도 없어지는 한계점이 온다. 그 상태에서는 집값이 살짝만 주춤하고, 이자율이 약간만 오르는 것만으로도 채무불이행률이 급증하게 되었다. 그 충격으로 집값이 더 내리고 이자율은 더 오르면서 거품이 터졌다. 대출을 해준 은행은 물론이고, CDO를 산 기관들도 큰 손해를 보았고,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전 세계에 금융, 경제 위기가 닥쳐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이 메커니즘의 특징은, 대출로 한계가 왔을 때 부동산 경기를 방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증권으로 폭발적 상승 추세를 만든 것이다. 어떤 실질이 있는 성장이 아니라 그냥 가격만 올렸다. 무언가를 생산해서 돈을 버는 산업자본과 달리, 거품을 만들어서 남의 돈을 가져오는 것이 투기적 금융자본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몇년 지나니까 미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동산 가격이 회복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위기가 극복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차액을 자산운용사가 다 가져갔기 때문에 양극화가 더 심해지고 말았다. '외환위기'라는 걸 당해 본 입장에서 '미국 사람들은 참 걱정이 없겠다' 싶었는데, 몇 명이 돈을 다 가져가는 구조라서사람들의 삶이 어려운 모양이다.
그리고 이때 커진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허무는 라이시씨의 말처럼 정말로 사회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 '가상자산'이 증거이다. 도박과 투기는 항상 어느 정도는 존재하지만, 이렇게 뚜렷한 폰지 산업이 이 정도로 주류가 된 적이 있었던가? “달러는 빅브라더이고, 금융업자는 탐욕스럽고, 정부의 통제는 싫다. 코인을 사자!” 그렇게 슬쩍 등장했다. 그 결과를 보면, 가상자산업자들은 코인을 팔아서 달러를 축적하고, 서브프라임 사태의 주역이었던 바로 그 금융업자들이 비트코인ETF를 내놓고, 정치인들은 이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만들고 있다.
로버트 라이시씨가 나오는 다큐 '자본주의를 구하라'
라이시씨가 시스템을 얘기하는 이유는 바꾸기 위해서이다. 그는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유리한 게임’을 제안한다. 1대 99의 게임이다. 99의 돈을 가진 쪽은 돈을 써서 해결한다. 반대로 돈 1, 머릿수 99인 쪽은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이제 “좋은 사람 뽑으면 정책이 개선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에 아낌없이 베풀기 때문에 누구를 뽑아서 어느 쪽에 넣어도 현재 시스템 '안'에서는 지금의 모습이다. 모두를 위한 정책이 동작하게 하려면 ‘워싱턴 밖’에서 좋은 보통 사람들이 ‘선거 후에’ 정책을 계속 감시하고 압박해야 한다."
라이시씨는 이제 78세라 대학은 은퇴했고, 사람들과 시민단체를 만들어서 유튜브를 한다. 일종의 '무슨 정책을 누구한테 압박할지'에 대한 정보 제공 활동인 듯 하다. 지금와서 서브프라임 관련 다큐나 영화를 보면, "글래스-스태걸법을 폐지하면 안됐고, 파생상품 규제를 했어야 됐는데~"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시민들은 로버트 라이시씨나 브룩슬리 본 같은 정책 담당자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
99에게는 뒷북 치면서 욕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져서 더 이용당하는 선택지 밖에 없을까? 아니다. 사실 대다수가 그렇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기 때문에 생태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너무 묵묵히만 있지 말고 조금만 설쳐보자. '그때 사퇴를 하지 말고 더 싸웠으면...'하는 옛날 생각도 가끔 든다는 라이시씨지만, 늘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질문한다는 점에서 그는 긍정주의자가 틀림없다. 그의 긍정적 질문이 유사한 상황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도 많이 전파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