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가 좋다.
어그로성 목적과 합법적으로 망상과 헛소리를 내뱉기 위한 이유로 에세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괴기스러운 글도 쓰긴 하지만 나는 시 쓰는 게 제일 재밌다.
다른 과목은 다 내팽개쳤지만 국어시간만큼은 눈을 초롱초롱 뜨고 집중했었고, 다행히 딱 국어만 성적이 괜찮았다는 웃픈 기억이 있다.(맞쭘뻡은 아직도 못한다.)
억양부터 익숙지 않은 고전시를 비롯해,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기 전까진 무슨 내용인지조차 이해하기 힘든, 격정의 시대를 겪으며 괴롭고, 서글프고, 애절한 서정적 마음이 그려진 시. 그런 시들이 특히 좋았다.
시는 긴 말로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만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휘어잡고 사물과 현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꿰뚫는다.
내 마음속에서 시는, 서커스 공중묘기를 볼 때 느껴지는 결과 비슷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칸이 여러 개로 나뉜 흰색 팔레뜨에 뿌려놓은 물감들에 물 한 방울이 들어가 경계를 헤집어 놓은 것 같은 느낌.
아직도 시에 대한 내 마음이나 생각을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다. 꿈, 희망, 사랑, 열망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 잘 모르겠다. 무엇으로 정의되든 상관없이 그냥 재미있을 뿐이다.
말도 잘 못하고, 장문의 글도 잘 못쓰는 나도 쓸 수 있는 언어. 시는 내 마음과 생각, 혹은 그 너머 미지의 세계에서 엿본 무언가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언어이다.
대신 시는 글쓴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거나 혹은 명확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자 장점이 있다.
특히 깊이 사유한 시는 더 그런 것 같다.
경험이나 지식의 차이도 있겠지만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에 따라 다른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직도 몇몇의 시는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고, 심지어 해석해 줘도 막막할 때가 있다;
스펀지밥에 나오는 불가사리 뚱이만 한 뇌를 가진 게 분명하다. 나도 시를 쓰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헤헤헤.
시는 시인이 창조한 새로운 언어라서 가끔은 다른 이가 보기엔 외계어처럼 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쓴 시도 내가 다시 말로 설명하려면 어렵게 느껴지는 걸. 물론 이것도 내가 가진 것의 한계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부족한 사람이 시를 쓰지 말란 법은 없잖아? (반박 시 가다가 참새똥 맞음. 미운 사람.)
과일은 과일만이 아니고, 강아지는 강아지이기만 한 게 아니다. 단어도 문장도 그렇게 마음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쓸 수 있다는 게 미친 존잼이다.
다만, 시는 쓰고 싶다고 마음대로 써지진 않는다.
머릿속에 일렁이는 사막 속 신기루 더미 속에서 글을 날래게 집어 와야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나 안개밭이 사방에 깔린 날은 정말로 날밤을 까도 끝인 것이다.
그런 점이 참 서글프고 매력적이다.
사람도 너무 착하게 퍼주기만 하면 매력 없다고 하는데, 시도 그런 느낌일까?
물론 나는 인간상에 관한 저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착한 게 최고이고 뭐든 퍼주는 사람은 오래오래 평생 함께 해야 한다. 최고의 인간상. 알러뷰 쏘머치.
나는 퍼주는 만큼 시를 쓸 것이다. 어딘가로부터 흘러내리든, 치솟든, 잡히는 것은 잔뜩 싣고 시로 달음박질칠 것이다.
제 시를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튼튼한 관절마디와 풍성한 머리숱이 함께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요즘 제게 절실한 부분이라.. 왜인지 빠지는 양이 크게 늘었습니다? 관절이 시큰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