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 깨작깨작, 의성의태어
여유를 부리며 꾸무럭 대다가 타려던 차를 놓쳤다. 몇 걸음 앞에서 버스가 방귀 뀌듯 부르릉거리며 떠났다. 버스 뒤꽁무니를 보며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유! 참았던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평소에는 발밤발밤 걷다가 오늘은 달음질치듯 걸었다. 거기다 걸으며 버스가 오는지 보려고 고개를 홱 돌려서 현기증이 확 몰려왔다. 도시 한복판이 바다가 된 듯, 먼 데 수평선이 어른어른했다. 바닥까지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흔들려 잠시 섰던 시간, 그 시간만 지체하지 않았어도 놓친 버스 안에 내가 있을 터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걸을 때마다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배가 고프긴 한데, 어디 들어가 먹고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하다. 그냥 집으로 향하는데, 이번엔 보채듯 꾸르륵꾸르륵거린다. 반려견 몽이 배 속에서 나는 소리와 같아 픽, 웃고 만다. 집에 있는 몽이를 떠올리니, 아침에 냉장고에 넣어놓고 나온 잘 익은 열무김치가 생각난다. ‘집에 가서 밥에 열무김치 넣고 비벼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집에 오자마자, 밥솥에 있던 밥을 퍼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1분으로 눌러놓고 그 앞에서 째깍째깍, 줄어드는 숫자를 보고 초까지 세며 기다렸다. 땡, 소리와 동시에 문을 벌컥 열고 김이 나는 밥을 꺼내 준비해 둔 열무김치를 듬뿍 넣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새로 짠 들기름 뚜껑을 열고 킁킁, 고소한 향을 맡은 다음 밥 위에 주르륵, 두어 번이나 듬뿍 따라 넣었다. 다 비비기도 전에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이렇게 크고 맛있게 들릴 소리던가. 하얀 백미에 입혀진 열무김치의 불그레한 색을 보고, 들기름의 고소한 향을 코로 흡흡 들이마시며 한 숟갈을 듬뿍 떴다. 욕심껏 올린 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욱여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열무 비빔밥을 먹으며 어제 먹다 남은 반찬 하나를 챙겼다. 눈으로 보는 맛있는 반찬이다. 20가지 때와 200가지 의성의태어로 쓴 동화 《후 불어 꿀떡 먹고 꺽!》이라는 책이다. 마침, ‘우걱우걱’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우걱우걱, 허겁지겁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릴 때 밥 먹으며 ‘깨작깨작’거린다는 지청구를 많이 들었다. 깨작깨작은 깨지락깨지락의 준말이다. 국어사전에서는 깨지락깨지락을 ‘조금 달갑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굼뜨게 자꾸 먹는 모양’이라고 풀어놓았다. 언어사용의 경제성에서 온 말이 준말인데 다른 단어는 몰라도 이 말은 본딧말보다 준말이 더 나아 보인다.
큰아이도 어릴 때, 나처럼 밥을 앞에 두고 깨작거린 적이 있다. 그걸 보다보다 안달복달하며 숟가락을 뺏어 들고 떠먹이곤 했다. 겨우 입에 넣어 줘도 밥 한 숟가락을 씹고 삼키는 데 과장해서 한나절은 걸렸다. 그래도 먹이겠다며 밥그릇을 들고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걸 본 엄마가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말고 한 끼 굶겨봐라.”
처음엔 안쓰럽게 어떻게 굶기냐고 했다. 그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날, 안 먹는 밥그릇을 치우고 간식도 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이는 누룽지를 뜯어먹다가 물에 만 눌은밥에 김치까지 얹어 그 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 잘도 퍼먹었다. 그야말로 허겁지겁 떠먹었다.
사실 나는, 음식들이 달갑지 않아서 깨작깨작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귀했던 때니, 배가 불러서도 아니었다. 다만, 먹는 속도가 굼뜰 뿐이었다. 지금도 밥 먹는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그런데 어떤 일은 반복의 결과로 손이 빠르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손이 재니 발도 따라가는 걸까. 아들이 중학생일 때 내게 했던 말이 종종 생각난다. 종종대며 걷는 내 뒤를 휘적휘적 따라오며 “엄마, 그 나이엔 좀 천천히 걸어도 되지 않나?”. 뒤돌아보니 아들이 저만치서 느직느직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을 거다. 누구와의 약속도 없고 빨리 다녀와야 할 이유도 없는 날이었다.
총총걸음에서 종종걸음을 지나 이제 거북이걸음이 편한 때가 되었다. 해가 더할수록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늘고 있다. 느려지는 걸음이 내 밥 먹는 속도와 수평을 이루니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긴 한다.
어찌씨* : 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