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에 다시 떠난 소풍
친정엄마는 꽃을 좋아하고 잘 가꾸셨다. 꽃에는 한없이 관대하여 마늘밭과 콩밭에 난 설악초며 맨드라미까지도 뽑지 않는 엄마가, 나무만큼은 꽃이 아무리 예쁘게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과감하게 베어버렸다. 사과나무와 백합나무, 오디나무를 비롯하여 대추나무까지. 당신 손으로 할 수 없는 지금은 사위 손을 빌린다. 한동안은 그냥 두자는 사위와 베어내라는 장모, 둘이 옥신각신했으나 이젠 그도 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 꽃을 피우지 않아도 열매를 맺지 않아도 사랑받는 나무가 있다. 바로 소나무다. 십수 년 전, 지인이 캐다 준 묘목이 어느새 거목이 되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소나무 순이 비 온 뒤 죽순처럼 쑥쑥 자란다. 기다란 젓가락 같은 솔 순을 잘라내다 보면 손이 어설퍼서 쑥대머리를 만들곤 한다. 올해는 유난히 순이 길다. 땅에 떨어진 솔 순을 치우는데 갑자기 아버지 산소 자리에 심은 소나무 생각이 난다. 벌써 십이 년이 지났다. 묘목이었던 소나무, 뿌리를 잘 내렸다면 꽤 자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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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아버지의 집이 있었다.
그곳은 소나무 그늘에 가려 잔디보다는 풀이 더 무성했다. 한낮이나 되어야 무성한 소나무 사이로 나온 햇살이 목말 타듯 아버지 어깨 위에 올라앉아 새들과 재롱떨다 훌쩍 사라지는 곳이었다. 음택은, 산 사람이 사는 집인 양택을 상대로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주로 술가術家에서 쓰는 말이다. 아버지의 집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도 음택이었다.
집에서 가까워 자주 가고 익숙한 길인데도 그곳은 늘 멀고 낯설었다. 어려서는 낮은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 산으로 들어서는 길부터 겁을 먹곤 했다. 입구에 버티고 선 상엿집에선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울울했던 크고 작은 소나무들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놓고 나와 숨바꼭질을 했다. 새가슴을 한 채 손에 닿지 않는 솔가지를 꺾을 때면 내 심장 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그럴 때면 솔가지를 봉분 앞에 던지듯 놓고 절한 다음 쏜살같이 산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까치발 딛고 서면 가지에 손이 닿았던 소나무가 지금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자랐다.
일곱 살, 아무리 늦되었어도 아버지와의 추억 몇 개쯤은 기억할 수 있을 나이인데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첫딸인 나를 많이 귀애했다는데 나는 까칠한 아버지의 수염도, 땀내 절은 그분만의 독특한 냄새도 기억하지 못한다.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아버지의 뒷모습뿐이다.
마당에 지게를 받쳐두고, 큰댁 마루 위로 올라서는 아버지의 마르고 단단한 등은 지쳐 보였다. 텃밭으로 나가는 쪽문으로 들어와 빈 지게 위에 올라앉은 저녁 햇살이 슬퍼 보였던 시간이었다. 빛바랜 사진 한 장 찾을 수 없어, 갈걍갈걍하게 생겼다는 전언으로만 가늠해 볼 뿐인 생전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마흔몇 해 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 파묘를 알리는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요란한 소음과 함께 굴착기가 달려들었다. 조심조심 풀을 베고 뽑으며 무너진 흙을 다져주던 아버지의 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마는 늘 마음 아파했다. 성근 잔디와 그늘진 것이 당신 잘못인 것처럼. 하지만 쌀가루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고운 빛의 흙을 보며 모두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흙이 기름진 것 외에도 고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조심스러운 삽질 속에 나무뿌리 몇 가닥 사이로 아버지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난한 촌부로 살다 갔으니 껴묻거리 하나 없이 묻혔을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의 육신은 이미 포슬포슬한 흙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다리뼈 조금과 머리 그리고 작은 헝겊 한 조각이 눈에 띄었다. 무늬 같기도 하고 글씨 같기도 한 얼룩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작은 직사각형 모양을 한 헝겊은 빛이 바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부적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어떤 염원이나 위로처럼 넣어준 일종의 껴묻거리였을까. 곱게 삭아가고 있는 조각의 위치를 보아 가슴께쯤이 분명했다. 생전 아버지의 흐릿한 뒷모습만 기억하던 내게 나타난 아버지의 앞모습을 헤아려보았다.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지관의 말에 따라 저어하기를 몇 해, 윤달이 든 올해 드디어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막상 파묘 의식을 치르고 나니 염려했던 것과 달리 편안하고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그늘져서 잔디가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죄지은 것처럼 여기던 엄마의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 겉보기와 달리 무덤 속 세상은 편안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작업하는 분의 “흙이 참 좋다.”는 말에 들여다본 흙빛,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의 낯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젊은 아버지의 양분을 먹고 자랐을 참나무와 아까시나무의 굵은 뿌리들도 싱싱했다.
온갖 상념 속에 숨죽이고 지켜본 수습 과정이 끝났다. 전날 밤 엄마가 손수 한지로 만든 상자에 아버지를 모셔 미리 보아두었던 양지바른 산 능선으로 향했다. 찰밥과 함께 하늘이 훤히 보이는 곳에 흩뿌렸다. 이제야 여행다운 여행을 떠나시라는 염원을 담아. 작은아버지는 형님이 훨훨 날며 세상 구경 잘하라고 미리 준비해 온 노잣돈을 섞어서 뿌렸다. 어디선가 산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는 안개로 자욱했던 산길이 잘 마른빨래처럼 밟을 때마다 바삭거렸다. 평토 작업을 마친 자리로 돌아와 준비해 간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집은 사라졌다. 어릴 때 본 아버지의 뒷모습, 흙으로 돌아가는 중인 아버지의 앞모습 그리고 공중으로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만이 남았다. 아버지가 계신 곳을 집이라고 여긴 적이 있다. 아니 아버지의 집이라고 생각해 왔다. 우거진 솔숲이 무서워 곱송그리면서도 다소곳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서서 절도 하고 힘들 때는 천진하게 아버지에게만 속말을 해본 적도 많다. 그 집이 사라진 날, 그것은 집이 아닌 무덤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빈집 앞에 서니 어쩌면 산소는 산 사람들의 마음 빚을 갚는 일이며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자리를 택해 무덤을 만들고 모시는 것도, 해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깎으며 예를 갖추는 것도 사실은 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가신 분을 추억하고 희미한 추억이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받기 위해 찾아가 내가 효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싶은 욕심이 아니었을까.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 떠나는 것을 소풍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일도 녹록지 않았던 아버지는 이제야 소풍을 떠난 셈이다. 그것도 이 세상 떠난 지 반세기 만에. 어느 시인은 모란꽃 피는 그믐밤에 숨을 거두고 싶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엄동설한의 끄트머리 이월 그믐밤에 돌아가셨고 사십여 년이 지나 모란꽃 피는 오월에 다시 여행을 떠나셨다.
의식을 마치고 천천히 산에서 내려오는 길, 뒤돌아서서 사라진 아버지의 집과 나무와 하늘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일곱 살 내 기억 속에서 멈춘 생전의 젊은 아버지 쉬었던 자리에 이제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잡았다. 오래전 지게에 얹혔던 햇살이 오늘은, 말랐지만 단단했던 아버지의 등 같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웃고 있었다.
2013. 봄
수필집《그설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