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사과나무의 안간힘, 지구가 그 안에
지난주만 해도 여섯 개의 사과가 매달려 있더니 이젠 한 알만 남았다. 그마저도 빨간빛이 나는 부분을 새가 쪼아 먹었다. 새라도 맛을 봤으니 다행이라며 사과나무를 올려다봤다.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봄이 꿈같다.
삼 년 전만 해도 가지가 땅에 닿을 것처럼 사과가 많이 열렸었다. 그해,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며 잘 커가던 사과들이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 흔들어댄 듯 이파리도 성한 게 없고 떨어진 열매의 빛깔도 일주일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가지가 땅에 닿을 것 같다고 지지대까지 세워준 게 한 주 전의 일이었다. 그때 열매가 너무 많으니 솎아주라는 친정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어느 걸 놔두고 어느 걸 솎아 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자연에 맡기고 싶었다. 또 바람 불고 태풍이라도 오면 이겨내지 못할 열매도 있을 테니 그냥 두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바람이 솎아 내고 남아있는 사과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바닥에 떨어진 사과는, 운동회 때 하늘을 뒤덮고 날아오르던 오색 풍선 같았다. 오이와 호박넝쿨이 여기저기 뒹구는 사과를 넓은 잎으로 감싸 안으며 새순을 뻗어가고 있었다.
떨어진 사과를 일단 치우기로 했다. 퇴비장에 버리려니 거긴 이미 호박넝쿨이 자리를 차지해 쉽지 않았다. 엄마는 자루에 담아 놓으면 포강에 버린다고 하셨다. 작은 연못, 그곳은 물방개와 가물치가 헤엄치던 곳인데, 이제 주변에서 버린 농작물 쓰레기로 죽은 못이 되었다. 그러니 거긴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사과나무 아래 묻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썩으면 나무에 거름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사과나무 아래 서너 개의 깊은 구덩이가 금방 생겼다. 플라스틱 대야에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담았다. 빛깔과 모양이 제각각인 사과가 대야에 가득 찼다. 몇 개의 구덩이 속으로 백여 개의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 융단이 깔렸던 사과나무 아래가 맨흙을 드러냈다. 사과 묻은 자리를 두 발로 꾹꾹 밟아줬다. 그 위로 치워뒀던 호박과 오이 넝쿨을 끌어다 놓으니 사과나무 아래가 다시 녹색으로 변했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땅속으로 들어간 것보다 남은 사과 헤아리기가 더 쉬웠다.
올해는 작년보다 유난히 덥다. 올해가 가장 시원할 해일 거라는 말도 들린다. 두렵다. 이대로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 몇십 년 후면 우리나라에서 사과나무 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더위에 제대로 익지 못하여 하얀색으로 변한 사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단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벌레도 나타났다. 미국흰불나방이라는 벌레는 뽕나무와 겹벚나무에 이어 감나무 등 넓은잎나무를 초토화하고 블루베리며 아로니아 잎까지 남김없이 갉아먹었다. 작년에는 나무밭에서 멀리 떨어진 겹벚나무는 무사했는데, 올해는 잎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갉아먹었다. 남편이 벌레를 하나하나 잡아도 보고 약을 쳐보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때뿐인 것 같다. 벌레는 5월부터 슬금슬금 나타나 8월까지 줄기차게 활동한다. 이 벌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1950년대라는데, 왜 지금 난리인 걸까.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올해는 블루베리 수확도 제대로 못 했다. 이로운 벌레도 무서운데, 해충인 데다 쐐기 같은 생김새만 봐도 소름이 돋아서다. 몸에 닿으면 피부병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소리에, 나무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는다. 다섯 그루의 블루베리 열매가 그대로 말라가기는 올해가 처음일 거다.
멀리서도 사과나무 아래 호박잎에 까만 벌레 똥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마치 비료라도 뿌린 것 같다. 열 살을 넘긴 사과나무의 껍질도 매끄럽지 않은 걸 보니 기대 수명 근처에도 못 갈 모양이다. 제대로 된 사과 맛을 못 봐도 봄에 꽃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올해는 우리의 무지와 벌레의 공격에 수난을 겪고 있다. 나무 몇 그루 없는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가로수도 벌레가 다 갉아먹었다. 삭정이 같은 가로수를 보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한해 한해 다른 일기는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거다. 그동안 우린 너무 편하고 예쁜 것만 찾아 누렸다.
직박구리의 간식이 된 사과 한 알, 몸살 앓는 지구와 닮았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