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버티고 나무도 버티고 그렇게 함께 견디는
시골에 내려갔더니 뒷집 아저씨가 감을 따오셨다. 벌레가 그렇게 기승을 부렸어도 용케 남았다며 봉지를 열어 보이는데 대여섯 개의 감이 모두 크기도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나무가 몸살을 앓으니 열매도 온전할 리가 없다. 그마저도 주로 우듬지에만 매달려 있으니 이제 남은 건 새들 차지라며 웃으셨다. 6년 전 일이 생각났다. 그해에는 아저씨 댁 감나무도, 한 그루뿐인 우리 집 감나무도 참 보기 좋았다.
2019년 6월 우리 집 감나무에 핀 감꽃
푸른 기와집 감나무 (2019년)
그 집은 처음부터 푸른 기와집이었을까. 마늘을 심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이 이엉을 엮어 올릴 때도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함석으로 바꿀 때도 빨간 벽돌집으로 지을 때도 그 집은 늘 푸른 기와집이었다.
오래전 그 집엔 할머니가 사셨다. 내가 결혼할 무렵 할머니는 작은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나가셨다. 그 뒤로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지붕 빼곤 모든 게 변한 지금은 부지런한 김 씨 아저씨가 주인이다. 하지만, 삼십여 년이 지났어도 저물녘 노을에 물드는 푸른 기와를 보면 할머니 계시던 옛집 같다.
마루 아래 봉당을 내려와 가라앉은 마당은 두부처럼 네모났었다. 부엌과 사랑방 사이에는 커다란 뒤주가 있고 곳간을 등에 업으며 펌프를 돌면 쪽문이 나왔다. 쪽문을 나와 수채를 끼고 돌면 뒷간이었는데 거기 벽에는 족제비가 걸려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잡아 온 족제비를 거기에다 걸어뒀다.
한 마리가 열 마리가 되고 그게 사라져도 한 마리는 남아있다고 여긴 건 처음 봤던 날의 기억이 그만큼 강력해서였다. 풍성한 꼬리털과 작은 머리, 가죽뿐이라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족제비의 눈을 봤다. 봤다고 믿었다. 그래서 구린 뒷간 냄새보다도 족제비가 무서워 볼 일이 급해도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펌프 대신 수도가 놓였고, 뒤주도 사라지고 나무 마루도 없어졌다. 마당이 높아지니 지붕은 낮아졌고, 솟을대문도 사라졌다. 또 향나무와 밤나무가 밑동만 남았다가 흙이 되었고 단풍나무도 베어졌다. 대신 감나무 세 그루가 아저씨와 함께 뿌리를 내렸다.
그 감나무가 올해 일을 냈다. 나무나 주인이나 깨깨 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올해 감나무는 부지런한 주인을 닮아가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간의 게으름을 퉁치듯 빈 가지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열매를 맺었다. 들일 나가던 아저씨가 들러 감 좀 따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림 보듯 바라만 볼 뻔했다.
남편과 제부가 마늘밭 두둑을 부지런히 내더니 양파망을 하나씩 들고 겅중겅중 뒷집으로 향했다. 동서끼리 따 온 감이 파란 망에서는 푸른빛이 돌고 빨간 망에서는 붉은빛이 났다. 우듬지에 감만 보고 따느라 터앝의 쪽파밭을 못 챙겼다고 실토하는 남편에겐 장모의 지청구가 떨어졌다. 하지만 남편은 그쯤은 달콤한 감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듯 천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쓰러진 파를 일으켜 세웠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어 접이 넘는 감을 따왔는데도 감나무는 여전히 빈틈이 없었다. 아저씨도 발에 밟힌 쪽파를 보고서야 감을 따 간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아저씨는 그 뒤로도 한동안 화수분에서 보물 꺼내듯 수시로 감을 땄고, 이웃집과 동네 사람들에게로 날랐다고 했다. 올해 수령 오백여 년이 된 상주의 하늘 아래 첫 감나무에는 삼천여 개의 감이 열렸다는데 푸른 기와집의 감나무 삼 형제는 몇 개의 감을 내놓았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그렇게 고옥(古屋)으로 가는 푸른 기와집은 올해도 세 그루의 감나무를 품은 내력(耐力)으로 또 한 겹의 내력(來歷)을 쌓았다.
2019년 7월 우리 집 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