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어딘가에서 늘 꺼내주기를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을 위하여
2025년 10월 11일, 도쿄의 릿쿄대 14호관 인근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시인이 간 지, 80년 만이다. 시인은 릿쿄대에서 총 다섯 편의 시를 썼는데, 그중 한편인 <쉽게 씌워진 시>를 동판에 새겼다.
지난 3월에 도쿄와 교토, 후쿠오카로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시비 제막식 기사를 읽으니, 릿쿄대 교정을 거닐었던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출간을 조금 미뤘으면 릿쿄대 시비 이야기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그도 감사한 일이다. 오늘은 흔들리는 마음을 잘 붙잡아 중심을 잡아야 할 ‘지금’을 잠시 여기에 내려놓기로 한다.
네 번째 수필집 <<봄에도 빛나고 가을에도 빛나는>> 2025.11.05
주머니에 담아 온 이야기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일부이다. 한글 타자를 처음 배울 때 이 시를 날마다 눈으로 보며 손가락으로 읽었다. 짧고 뭉툭한 손가락이 움직이며 자음과 모음이 모여 낱자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했다. 처음엔 오타가 더 많았지만, 다시 돌아가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를 느끼며, 언젠가 속기를 배우겠다고 서울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고 며칠 다니다가 포기한 게 생각났다. 몽똑한 손가락도 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 쉽게 포기했던 때다.
한때 시인의 양장본 시집을 외출할 때마다 챙겨 다닌 적도 있는데, 그때 자주 읽었던 시가 「서시」, 「새로운 길」, 「자화상」이었다. 지금은 「쉽게 씌워진 시」와 「참회록」과 「주머니」를 비롯한 동시를 자주 읽는다. 시인의 흔적을 찾아 떠났던 일본 문학기행 덕분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워진 시」 일부
시인이 6개월 동안 다녔던 도쿄 릿쿄대 1104호 강의실. 복도에 서서 시인이 앉아 있었을 자리를 가늠해 봤다. 창가에 앉아 노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바깥 풍경을 눈에 담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시대처럼 올 아침을’ 맞지 못한 시인을 생각하며 강의실을 나와 구 도서관을 둘러보고 보이지 않는 시인의 발자국에 도장을 찍듯 교정을 거닐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새로운 길」 일부
도쿄에서 다시 교토로 이동했다. 도시샤대학과 마지막 소풍 장소인 우지강과 하숙집터를 찾아간 날은 비가 오락가락했다. 세 곳 모두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장소이다. 도시샤대학과 하숙집터에서는 「서시」가, 우지강변에서는 「새로운 길」이 우리를 맞았다. 기억과 화해의 비를 세우기 위해 애쓴 교토 시민들을 생각하며 시비 앞에서 묵념했다. 눈물 같은 비가 내렸다. 일본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쉰다는 도시에서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슬프면서도 느꺼워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편, 고대 일본의 수도로 1,000년 이상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시에 시인의 시비를 세 개나 세운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시비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도시샤대 교정의 시비 2025.03.19>
<하숙집터 시비 2025.03.19>
<우지강변 시비 2025.03.19>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전문
마지막으로 찾아간 구 후쿠오카 형무소. 그날은 하늘이 푸르렀다. 지금은 구치소로 사용하는 건물 주변에 강이 흘렀다. 이름이 카나쿠즈[金屑川]라고 했다. 여기서는 인적 드문 밤에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다가 가깝다는데, 시인도 파도 소리를 들었을까. 구치소 건물을 보니 시인의 「길」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굳게 닫힌 쇠문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푸른 하늘에 부끄럽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간 시인은 담 저쪽에서 잃은 것을 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시인이 ‘풀 한 포기 없는’ 길을 걸어 ‘담 저쪽’에 낸 새로운 길, 많은 사람이 오가 풀이 무성하지 않은 빛나는 길이 된 것을 시인은 아실까.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동시 「주머니」 전문
도쿄와 교토, 후쿠오카까지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세 도시를 돌고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에서야 가방을 풀었다. 꺼내는 옷마다 습관처럼 주머니들을 살폈다. 릿쿄대를 돌아보던 날 입은 옷, 교토의 도시샤대와 우지강, 하숙집을 돌아보던 날 입었던 옷, 마지막 날 지금은 구치소로 바뀐 구 후쿠오카 형무소 앞에서 묵념했던 옷까지. 시인의 이야기로 주머니가 갑북갑북했다.
빈 주머니로 떠났지만, 슬픔, 비감, 비애 등 여러 빛깔의 이야기가 주머니마다 들어 있다. 이제 내 기억 호주머니에 담아 온 소중한 이야기를 주변에 풀 차례다. 오늘은 풀기 전에 하나하나 살펴볼 참이다. 동시 「주머니」부터 읽고, 시작해야겠다.
(2025.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