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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만 제이 Oct 27. 2020

일단 해보고 후회하자!

선택의 기로에 선 그대와 나에게...


"In any moment of decision, the best thing you can do is the right thing, the next best thing is the wrong thing, and the worst thing you can do is nothing."

모든 결정의 순간에 있어, 최선의 선택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좋은 선택은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며, 가장 안 좋은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



내 사춘기를 장악했던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한 명은 파리 소녀, 또 한 명은 대구 소녀...


파리 소녀는 소피 마르소다. 당시 그녀는 사춘기 소년들의 우상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기라, 학교 앞에는 인기 연예인들 사진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꼭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에는 초상권 같은 계념이 한국에는 없었나 보다. A4 사이즈의 사진부터, 브로마이드라 부르는 대형 포스터 사진까지 많은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는 가게. 그런 가게에서는 손님이 고른 2장의 연예인 사진을, 앞뒤로 붙여 라미네이팅 책받침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인기 있던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피비케이츠, 김혜수, 이미연 같은 여자 연예인을 "책받침 여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내 방에는 벽면 전체가 소피 마르소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라붐에서 보여준 청순한 이미지의 소피 마르소는 내 사춘기 초기를 온통 뒤흔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영화 전문 잡지 "스크린"에 실린 소피 마르소의 누드사진을 보고, 나는 그녀와의 이별을 고했다. 내가 꿈꿔온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는 것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참 바보스러울 만큼 순진했던 것 같다.


평생 한 번도 못 만나본 가상의 여신이 소피 마르소였다면, 내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여신도 있었다. 바로 나보다 한 살 위였던 "교회누나"와의 첫 만남이었다.

중 2 여름방학 때였던 것 같은데, 교회 예배당에서 "라붐" 주제가인 "Reality"를 누군가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었다. 한때 소피 마르소 열렬팬이었던 나는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지 너무 궁금해, 예배당 문을 빼꼼히 열었다. 예배당 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 피아노 앞에 다소곳이 앉아 연주하는 그녀는 정말로 여신 같았다.

그 날 이후 시작된 나의 그녀를 향한 짝사랑 열병은 무려 6년간 계속됐다. 심각한 짝사랑 말기 환자였지만, "한참 공부해야 할 중고등학생이 연애하면 대학은 물 건너간다", "연애는 대학 가면 질리도록 할 수 있다"는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연상연하 커플은 가망이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애써 체념시켜야 했다. 누군가에게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당시의 나의 선택은 그녀에게로의 고백이 아닌, 혼자서 시와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지금도 대구 집에 그 당시에 썼던 글들이 있는데, 40대 중년이 된 지금도 가끔 읽어보면 여드름 가득한 10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탄 묘한 느낌이 든다.


매주 일요일에 한 번씩 만나는 그녀...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그녀가 이사를 가게 되어 교회를 옮기면서 일요일에도 못 보게 됐을 때의 슬픔이란...

1993년 대학생이 돼서,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미팅, 소개팅에 전력을 쏟고 있던 때,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와 경북대 후문 앞을 지나가다가, 버스정류장에서 그녀를 본 것이 마지막이다.

하얀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버스정류장... "어? 오랜만이야~! 잘 지내니?" 하고 웃으며 인사하는 "교회누나"...

그 모습은 중2 여드름 소년이 본 여신을 넘어서 너무나 눈부셔 바라보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 날 이후 나 같이 아무것도 없는 놈이 가까이할 여인이 아니라는 일종의 단념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6년간의 짝사랑도 추억 속으로 고이 접어 넣었다.


지금은 결혼해서 딸까지 있는 행복한 가장이지만, 가끔 그때 그녀에게 고백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체념했건만, 대학에서 만난 첫 여자 친구도, 지금의 아내도 나보다 한 살 많은 연상이라는 사실. 어쩌면 연상 여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스스로를 체념시키기 위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교회누나"는 나에게 사춘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인생의 가르침도 주었다.


"해보고 하는 후회는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그러나, 안 해 본 것에 대한 후회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그 놈의 미련이라는 놈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결국 우리가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결정해 나가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선택이고, 선택이 우리 자신이다.


나는 선택에는 크게 2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여러 가지 옵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양자택일로 이루어진 선택이다.


첫 번째 경우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질리도록 해왔던 "사지선답"형 문제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사지선답형" 질문은 대체로 "다음 중 옳은 설명을 하나 고르시오" 혹은 "다음 중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하나 고르시오" 등,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인생의 "사지선답형" 질문은 주로 "한다"를 전제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볶음밥"을 먹을 것인가, "잡채밥"을 먹을 것인가 하는 극도로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어려운 선택도 있다. 일단 "먹는다"를 전제로 "뭐를 먹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학창 시절 간혹 시험에 나왔던, "OX 문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OX 문제는 "고래는 어류이다 (   )"처럼 괄호 속에 O 혹은 X를 넣게 함으로써, "옳은가? 그런가?"를 묻는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OX 문제"는 "옳은가(O)? 그런가(X)?"를 묻는 경우보다, "할래(Go)? 말래(Stop)?"를 묻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 누구도 "이건 분명히 옳고, 저건 분명히 그르다"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녀에게 고백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유학을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퇴사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학창시절에는 "OX 형"이 "사지선답형"보다 쉬웠다. 정답확률이 무려 50%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왜 "OX 형" 선택이 더 어려울까.


이런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대부분의 경우 "하자!(Go!)"를 선택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쓰리지만, 해 봄으로써 얻는 교훈도 있고,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과정과 결과가 명확하다.

또한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하고 싶다"를 내면의 무의식 혹은 의식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예들에서 "그녀" "유학" "퇴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없다면, 고민 자체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문과가 아닌 이과를 택한 나의 선택은, 대학 선택 시의 성적 저조와 공대에서의 부적응이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적어도 나는 내 적성이 꿈꿔왔던 의사가 아니었다는 것과, "하고 싶은 것" 보다 "해야 할 것 같은 것"을 우선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고, 우여곡절 끝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수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후회"는 있어도 씻을 수 없는 "미련"은 없다.

 

"하고 싶다"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있지만, "돈 때문에" "나이 때문에" "가족 때문에"라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망설여서 "하지 말자"로 결정하면, 내 경험상으로는 "그때 했었더라면..." "그때 해 볼 걸..."이라는 미련이 남는 경우가 많았다. "제2의 교회누나"는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뭔가 망설여지는 상황에서는 주저 없이 "하자!"로 결정하고,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만 고민한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회누나” 가 아닌,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린 날의 내 자신에 대한 미련인 것 같다.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대학 4학년 때 일본 유학을 선택한 것도, 안정적이고 만족하고 있었던 한국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만 34세의 나이로 무작정 MBA 유학을 떠난 것도, 재일교포 외에는 한국인 직원이 없었던 스미토모 상사의 본사에 나 홀로 한국인으로 취업을 결심한 것도, 결국은 세월이 지나 "그때 해 볼 걸..."이라는 미련을 가지기 싫어서였다.


"이휘재의 인생극장" https://www.instiz.net/pt/252299


20년도 지난 코미디 프로그램이지만,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인공인 이휘재가 어떠한 상황에서 "할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그래 결심했어!"라고 주먹을 불끈 지고는 "한다"의 결심에 따른 결과와 "만다"에 따른 결과를 모두 보여주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매 에피소드마다 "둘 다 좋은 결과" 혹은 "둘 다 좋지 않은 결과"를 항상 세트로 보여줬던 것 같다. 어느 선택이 항상 옳다 혹은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음이 아닐까.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의 수많은 단점들을 고민하며 망설이다 시간을 보내거나, 포기하거나, 결국 아무 결정도 안 하는 것보다, 자신의 뱃심을 믿고 (Trust your gut) 일단 해 보는 건 어떨까.


유년기 혹은 청년기의 젊은 분들은 설령 자신의 선택이 기대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별로 잃을 것도 없는 시기이고, 언제든 궤도를 다시 수정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와 체력적인 여유도 있다.


설령 자신의 선택으로 힘든 시기를 겪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우고, 그다음 선택을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Whenever you fall, pick something up."

넘어질 때마다, 무언가를 주워라. (Oswald Avery, 캐나다의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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