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부로언치

25章.인수타구람人遺他久覽

부로언치浮路言致

by 진우


곽 하오. 조선 중종 때의 학자(1492~1547).
성은 곽郭, 이름은 하오河午, 자字는 다음多音, 호號는 가독加讀, 본관은 제주濟州. 세간世間에 떠도는 말들을 모아 ‘부로언치浮路言致’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매거진每去盡’, ‘부론치북不論治北’ 등을 저술하였으나 왜란倭亂 때 모두 소실燒失되었고, 그중 일부一部만이 구전口傳의 형태形態로 오늘에 이른다.


0IogDNC4GYXNa_vK71dqaNJCVRI.jpg 가독 곽 하오 대감 (1492~1547)


중종 4年 7月, 임금께서 과거科擧 제도制度의 개선改善에 대해 고민苦悶하시였다. 본시本是 과거科擧라 함은, 선비가 익힌 선현先賢의 학문學文을 바탕으로 각자各自의 실력實力을 경주競走하는 것이나, 시험試驗 당일當日 본인本人의 신체여건身體與件에 따라 제 실력實力을 충분히 발휘發揮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임금께서 어엿비 녀기신 것이었다.


또한 구문口文은 공자孔子이나 실상實像은 견자犬子인 탐관오리貪官汚吏 또한 수시隨時로 발각發覺되어 추포追捕되는 바, 임금께서 가독加讀 대감에게 하명下命하시되, “정우성正優性은 조인성早引成이라(바르고 뛰어난 성품은 일찌감치 형성된다는 뜻). 공公은 좋은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할 새로운 제도制度를 마련하라.” 하시였다.


이에 대감께서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묘책妙策을 준비準備하시고 공표公表하시니, 그것은 곧 선비가 득得한 지혜智慧 뿐만 아니라, 평소平素 생활상生活相까지 등락登落에 반영反映하는 제도制度였다. 따라서 익년翌年부터 등과登科하고자 하는 모든 유생儒生들은 자신들의 일상日常을 소상히 기록記錄하되, 의무적義務的으로 그것을 제출提出하도록 하였다. 대감께서 새롭게 만든 평가評價 제도制度를 일러 인수타구람이라고 칭稱하였다.


인수타구람人遺他久覽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지 오랫동안 살펴보다

(遺 : 따를 수 覽 : 살필 람)


이에 각各 유생儒生들은 매일每日 자신自身이 섭취攝取한 조식早食, 중식中食, 석식夕食을 기록記錄함은 물론, 새로 구매購買한 장신구裝身具와 견묘犬猫 등의 가축家畜, 가마, 팔도유람일지八道遊覽日誌, 머물렀던 주막酒幕의 상세詳細, 그리고 부친父親이 소유所有한 전답田畓을 정리整理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반면, 딱히 등재登載할 것이 없는 빈곤貧困한 처지의 선비들은 ‘나도 가끔 눈물을 흘린다’라고만 기록할 뿐이었다.


인수타구람人遺他久覽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비중比重을 차지하는 항목項目은 타인他人의 추종追從이였다. 대감께서 첨언添言하시되, “유생儒生들은 장차 조정朝廷의 대소신료大小臣僚가 될 것이며, 향후向後 조선의 정치政治를 담당擔當할 것이니 본인本人을 좋아하여 따르는 백성百姓이 많아야 할 것이니라.” 하시며, 이에 조아요팔로우 숫자를 채점採點의 중요기준重要基準으로 삼았다.


조아요팔로우助我樂八老友

나를 돕고 좋아하는 팔도의 오랜 친구

(助 : 도울 조 樂 : 좋아할 요)


한편 인조仁祖 임금 때 동해안東海岸에 황모벽안黃毛碧眼의 미리견彌利堅 수리공修理工 막후죽허보구幕後 竹虛報久가 조난遭難당하였다. 이후以後 죽허보구竹虛報久가 조선을 탈출脫出, 본국本國으로 돌아간 다음, 조선의 인수타구람人遺他久覽을 모방模倣하여 만든 것이 이른바 면책面冊 facebook이다. 그의 후손後孫들은 면책面冊을 통하여 노비奴婢 신분身分에서 벗어났고, 결국 인수타구람人遺他久覽을 베껴 팔아 부富를 쌓은 뒤, 미리견彌利堅 제일第一의 갑부甲富가 되었다더라.




그때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인수타구람人遺他久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자 주작朱雀, 앞으로 나아가 예禮를 갖추어 말하되, “소인, 최근에 스승님을 팔로우하였사옵니다. 칭찬해 주오소서.” 이에 스승이 크게 놀라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그게 정녕 너였단 말인가?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즉시 차단하였으니라. 물론 신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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