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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1. 2021

골목의 추억

놀다보면 하루가 너무도 짧아


일터에 나가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여섯 살 어린 코흘리개 동생을 돌봐야 하는 것은, 친구들과 마음껏 놀고 싶었던 누나에게는 꽤나 성가신 일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살구 받기와 고무줄놀이에서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려면 ‘몸’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등에 찰싹 달라붙은 이 놈의 껌딱지는, 종아리에 매단 모래주머니처럼 그지없이 불편한 핸디캡이었을 테니 말이다.


고무줄 위로 펄쩍거리는 누나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리고 네모 딱지를 넘기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해 패대기를 치는 누나에게서 역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나는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누나의 옷자락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내 손아귀 힘이 유달리 강한 이유가 어쩌면 그것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골목 안 풍경 (故 김기찬 선생님)


누나의 등에서 내려와야 할 만큼 자란 이후에도 나는, 햇볕 잘 드는 담벼락에 등을 딱 붙이고 쪼그리고 앉아 누나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럴 때마다 누나와 또래들은 항상 노래를 불렀다.


땅을 짚고 고무줄을 넘거나, 서로의 어깨를 잡고 종종걸음을 뛰거나, 때로는 단둘이 마주 보며 손바닥을 아래 위로 마주치며 놀 때에도 누나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들은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입가에 맴돈다. 이른바 귀가 아닌 몸이, 그리고 나의 마음이 그것들을 오롯이 기억하는 것이다.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마요네즈 케키는 맛 좋아

인도 인도 인도 사이다

사이다 사이다 오 땡큐


딱따구리와 마요네즈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전혀 가늠이 안 되는 마요네즈 케키란 또 어떤 맛일까? 하물며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인도라는 나라. 과연 사이다의 원산지는 인도였을까? 게다가 화룡점정, 오 땡큐라니. 이 대단한 국제적 감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싸바싸바 알싸바 얼마나 울었을까

싸바싸바 알싸바 천구백칠십팔 년


이 노래를 안데르센이 지었다고 우기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 백 번 양보하자. 그럼 싸바싸바 알싸바는 덴마크의 전통 추임새인가? 누나와 친구들은 천구백칠십팔 년에서 시작한 노래를 대략 천구백구십 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냈다. 아마도 누군가가 고무줄에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를 불러 주었더니 아내는 조금은 다르게 기억한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새어머니와 두 딸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슬펐을까요

샤바샤바 이샤바 천구백팔십일 년


1975년생 아내가 1981년에서 노래를 시작한다. 이유는 모르겠단다. 샤바샤바 아이샤바의 뜻 역시 일단 물음표를 달아둔다.




간질간질 간질

발가락이 간지러워

병원에 갔더니 무좀이래요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난 몰라


못 살겠다. 당시 무좀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이 그렇게 많았을까? 아니면 정부가 아이들의 깨끗한 발 관리를 위해서 미리 만들어 몰래 퍼뜨린 걸까? 이 노래는 무한반복이다 역시, 고무줄에 발이 걸릴 때까지란다.


(참고) 고무줄놀이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정해진 줄을 계속 밟아야 하는 것과, 정해진 줄을 절대 밟거나 건드려서도 안 되는 고난도 규정. 그리고 줄을 밟되 높이가 순차적으로 높아지는 규칙과, 난이도가 높아지면 땅을 짚고 재주까지 넘어야 하는 단계까지. 사내아이들이 고무줄을 쉽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무찌르자 공산당 몇 천만이냐

대한 넘어가는 길 저기로구나

나가자 어서 가자 승리의 길로

나가자 가자 어서 가자 올려주세요


부모님, 적어도 내 어머니가 기억하는 이 노래의 첫 소절은,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라고 한다. 누나가 목청을 높였던 때는 국시國是가 반공이던 시절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의 올려 주세요는 당연히 고무줄을 더 높게 올리라는 뜻이다.




월남 마차 타고 가는 캔디 아가씨

공주마마 납신다 (서울 버전)

월계 화계 수수 목단 금단 토단 일

공주마마 납신다 (부산 버전)


캔디 아가씨는 왜 월남 마차를 탄 것일까? 테리우스와 안소니가 파병이라도 간 것일까? 뜬금없이 공주마마는 그 좋은 궁궐을 두고 무엇하러 흙먼지 풀풀 나는, 못 사는 우리 동네까지 납신 것인지, 대체 이 노래는 누가 만든 것일까?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한 장 말고 두 장이요

두 장 말고 세 장이요 세 장 말고 네 장이요

도리도리 도리도리 ~ 얍! (서울 버전)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엽서 한 장 써 붙여서 우리 아빠 오실 적에

구리구리 구리구리 장 깨비 쇼이 (부산 버전)


이것은 고무줄 노래가 아닌, 손가락 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다. 이긴 사람이 임의의 손가락으로 진 사람의 목덜미를 콕 찍으면, 진 사람은 그 감각만으로 어떤 손가락인지 맞춰야 하는 고난도 촉감 게임이다. 후렴으로 봐서는 일본 동요에서 온 듯하다.




엄마야 뒷집에 돼지 불알 삶더라

좀 주더나? 좀 주더라

맛있더나? 맛없더라

찌릉내 빠릉내

찌릉내 빠릉내 나더라


누나가 고무줄을 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 적은 없다. 이것은 그저 마음에 맞지 않는 친구를 놀릴 때 불렀다. 서울 친구들은 이 노래를 모른다고 했다. 결국 부산 경남에서만 전해지는 이른바 왕따 노래인 듯하다.


살구 받기 또는 공기놀이 (사진출처 : 서울시교육청)


가방은 마루의 친구다. 가방은 마루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마루에 던지는 것이다. 마루에 던져진 가방은 슬픈 눈으로 대문을 바라본다. 그 대문 밖으로 골목이 있다. 그리고 그 골목에는 친구들이 있다. 몇 시에 만나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늘 거기에 있다. 무엇을 하며 놀까 궁리하기도 전에 놀이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저 눈치껏 끼면 된다.


돌을 주워 홀짝 개수를 맞추기도 하고, 바닥에 줄을 긋고는 밟지 않기로 한다. 달력이나 심지어 공책을 북북 찢어 이리저리 접은 다음, 넘기려고 서로 죽어라 쳐대기도 한다. 발뒤꿈치로 땅을 돌려 파서는 구슬 넣기를 한다.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돌을 튕기면서 땅따먹기를 한다. 통통 튀는 공이나 고무줄은 꽤나 사치다.


같이 놀자 소리가 없으면 따로 놀아도 된다. 그러면 같이 놀지 못하던 한둘이 어느새 모여 또 같이 논다.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놀 거리는 차고 넘쳤고, 같이 놀 친구도 골목을 채웠다. 그저 아쉬운 건 ‘해’였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그때의 해는 그렇게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은 해를 더욱 재촉하는 아쉬운 한마디.


“제이야, 그만 놀고 밥 묵어라.”


골목 안 풍경 (故 김기찬 선생님)


그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구슬 하나에 멱살잡이를 했던 현광이도 그립고, 한 시간 밀어주면 한 번 태워준다던 자전거 가진 현수도 그립다. 한 개만, 딱 한 개만 달라며 번데기 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병철이도 그립고, 뒷산에 딸기뱀 잡으러 가자던 찬우도 그립다. 우리 주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던 장호네 똥개 메리마저 그립다. 그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가 그립고, 그 노래를 부르며 깔깔거리던 우리들의 그 웃음이 그립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그립기만 한 그 시절.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오늘따라 그 골목이 눈물 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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