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지독했던 가난은 아버지의 위장에 문제를 일으킨 주범主犯이었다. 어쩌다 이웃에서 얻어온 고구마나 싹이 난 감자,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땐 쉰 보리밥 한 덩이가 하루 식사의 전부였으니 제대로 된 영양 섭취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겨우 보리죽 한 그릇을 제때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 아버지의 위장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상태였다.
소화 장애는 결국,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평생 위장약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 음식은 언제나 싱겁고 밋밋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른 집들도 그냥 그렇게 먹는 줄 알았다.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 인부 아저씨들을 따라 난생처음으로 짬뽕을 시켜 보았다. 그러나 두 젓가락을 채 먹지 못했다. 대신 찬물은 두 주전자를 마셨다. 같이 일하던 아저씨들이 놀렸다.
"임군, 알고 보니 공주님 입맛이여? 허허허."
"와아, 아저씨, 이게 과연 사람이 먹는 음식인가요?"
반장님은 대답 대신 내가 남긴 짬뽕을 자기 그릇에 훌러덩 부어 버렸다. 제대로 된 매운 맛을 처음 경험했던 날로 기억한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이 매운 것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회식이 문제였다. 진땀을 부르는 매운 냄새부터 속수무책이었다. 보기만 해도 혀가 얼얼하고 겨드랑이가 먼저 젖었다. 제목이 무려 ‘매운 찜갈비’라고 했다. 얼마나 맵길래 이름에다 미리 '맵다'라고 해 두었을까?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던 시절이어서 메뉴 선택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아예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으니, 우리 막내는 싱거운 걸 좋아하니까 사람도 싱거운 거라면서 부장님은 내게 ‘싱겁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캡사이신 부장님, 싸와디캅!
더 큰 문제는 결혼을 하고 나서 생겼다. 연애 기간 동안 아내는 거의 모든 것을 내게 맞춰 주었다. 특히 내가 고른 음식들을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다음엔 저걸 먹어보자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식성까지 이렇게 서로 잘 맞냐며 나는 감탄하고 또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내의 치밀한 계산임을 그때는 몰랐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본격적으로 판세를 뒤집으려는 아내의 속셈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결정타는, 아내의 가족, 그러니까 처가 식구 모두가 매운 음식 마니아였다는 사실이다.
결혼 후 한 달 즈음 지났을 때였다. 처가와 오분 거리에 떨어져 살던 우리는 주말이면 가끔 장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곤 했다. 그날은 처제도 따라나섰다. '아내 사랑은 장모 사랑'이 아직은 유효하던 때라서, 메뉴의 결정권을 당연히 장모님께 넘겼다. 어머니, 드시고 싶은 것 고르세요. 아니다, 니 묵고 싶은 거 골라라. 아닙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주인공이니까 마음대로 고르세요. 그래, 그럼 우리 거기로 갈까? 그 순간, 장모님과 아내, 처제의 은밀한 눈빛 교환을 어떻게든 알아차렸어야 했다.
김 아무개 낙지
아, 낙지집이네요? 낙지 좋죠. 간판을 올려다보며 내가 큰소리로 떠들었다. 들어가시죠, 어머니! 힘차게 문을 열었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돌아 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의 문이 열리는 순간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게 낙지라구요? 그것은 내가 알던 낙지가 아니었다. 낙지란 그저 뽀얀 국물 속에 호박, 버섯, 청경채가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서, 어허 좋다 반신욕이나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뻘건 양념으로 온몸을 두른 낙지가 파를 친친 감고서 뜨거운 김을 훅훅 내쉬고 있다. 양파도 맵고, 파도 맵고, 양배추도 맵다. 심지어 젓가락도 맵다. 자신감은 이미 잃었지만 조금 남은 자존감이 그래도 겨우 한마디를 던지게 한다.
“어머니, 그런데 이 집은 참깨가 참 맵네요. 하하, 하하하.”
그때까지 몰랐던 사위의, 형부의 입맛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 정도도 못 먹어? 아닙니다. 먹어 볼게요. 이게 뭐가 맵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형부, 완전 아기 입맛이네? 내가 좀 그렇지, 하하. 오빠, 한 점만 먹어봐. 응, 배가 부르네. 형부, 이 쪽은 덜 매워요. 그래 그래. 물에 씻어 줄까?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씻으면 덜 맵나요?
매운 음식을 먹게 하려는 아내와 처가 식구들의 집요한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어쩌다 우호적인 분위기에서의 ‘죽기 전에 매운 음식 한 개 정도는 괜찮잖아?’라는 회유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매운 것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나날이 커져갔고, 매운 것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굶고 말겠다는 한시적인 단식 선언을 할 때도 있었다.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식사 자리도 있는 법이라며 아내는 그것을 핑계로 꾸준히 내게 매운 음식을 권했다. 조금씩 먹다 보면 점점 괜찮아질 거라는 논리였다. 어느 정도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러나 신라면도 겨우 응대하는 수준인데 매운 나라에서 온 친선 사절단이 하필이면 불닭 볶음면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핫 HOT이라니, 대체 어떤 몰지각한 과학자가 이렇게 위험한 화합물을 만들었단 말인가? 없어져야 할 음식, 18위에 일찌감치 올려 두었다.
아내는 지금도 도전을 종용한다. 나와 함께 웃으면서 매운 돈가스를 먹는 날을 꿈 꾼단다. 그 도전의 일환으로 오늘 저녁에는 매운 냉면을 먹어 보기로 했다.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식사 중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땀은 뻘뻘, 혀는 얼얼, 눈물 찔끔. 아줌마 여기, 쿨피스 억수로 큰 거 ‘두 개’ 주세요. 한 그릇 뚝딱에 실패할 것은 분명하다.
예견된 실패의 변명에 덧붙여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역사적 이유까지 구구절절 쓰고 있다. 호들갑이라며 욕을 들어 먹더라도 상관없다. 매운 것은 딱 질색이다. 진짜다. 오후 네시 반 즈음에 갑자기 몸살이라도 나면 정말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