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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ug 07. 2021

메이 브릿의 노래 (2)

1976년 10월 22일생, 김수영


https://brunch.co.kr/@jay147/147


잠깐 동안의 즐거운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남편 알프레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메이, 홀트의 담당자는 왜 우리에게 애리원을 알려 주었을까? 당신은 서울에서 발견되었고, 서울의 고아원에 맡겨졌다고 했는데 무려 오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여기는 분명 서울이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홀트의 담당자가 그녀에게 애리원을 알려준 까닭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메이 브릿이 머물렀다는 서울의 고아원과 마산의 애리원이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관련된 자료가 애리원에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역시 없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마산 애리원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음을 전화로 확인한 것뿐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메이 브릿이 조용히 알프레도의 손을 잡았다.

“알프레도, 나는 나의 오래된 문제를 반드시 풀고 싶어. 정답이 무엇인지는 아직 몰라. 다만 홀트가 전해준 힌트는 나를 정답에 한걸음 더 가깝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애리원에는 정답이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또 다른 힌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확신해.”


알프레도가 메이 브릿을 껴안고 살짝 입을 맞추었다.

메이 브릿이 얼마만큼 진지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과거에 접근하려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남편에게 안긴 채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Jay, what should we do now? 제이,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얼른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나는 한껏 과장된 동작으로 그들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일단은 체크인부터! That is a really good question. Let's check-in first.”




나는 이미 식사를 한 상태였지만 저녁을 두 번 먹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계산한다는 조건으로 메이 브릿 가족을 호텔 근처의 한정식 집으로 안내했다. 부산의 특색이 담긴 전통 요리를 기대하는 가족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뒤로 갈수록 맛있는 음식이 등장하니 초반부에는 반드시 맛만 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간장 한 방울조차 남김없이 싹싹 비워버렸다. 바이킹의 후예임을 깜빡 잊었다. 부산 토박이인 나조차 껄끄러워하는 개불마저 깨끗이 해치우는 것을 보고선 깜짝 놀랐다.


식사 도중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덴마크어語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했던 것은 그녀의 가족 모두가 지금의 상황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연히 감정에 취해서 몰래 눈물까지 찔끔거렸던 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소주 몇 잔에 흥이 오른 메이 브릿이 갑자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덴마크 동요란다. 어린 시절 그녀가 울고 있을 때면 양부모님이 불러주었다고 했다. 물론 노랫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곡조는 약간 슬펐다. 우리 동요 ‘섬집 아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메이 브릿이 시작한 노래는 곧 가족 모두의 합창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느새 마음이 푸근해졌다. 메이 브릿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의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녀가 막판에는 내게도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끝내 거절했다. 더할 나위 없이 푸근하고 따뜻한 자리에서, 차마 “꽃피는 동백섬”목메어 부르짖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정홍채 사장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호텔과 공항 간 개인 셔틀을 운행하는 분이다. 메이 브릿의 사연을 설명한 다음, 그날 소요되는 비용은 모두 내가 부담할 것이라고 했더니 이제까지의 신세도 갚고 좋은 일도 하겠다며 무료 봉사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고마웠다. 움직이는 만큼 수입인 사람에게 그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잘 안다.  

한편, 그날 진행될 일들을 그녀의 딸들에게 더욱 자세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영어보다는 덴마크어가 더욱 편할 것이었다. 경성대학교에서 공부 중인 덴마크 유학생 얀 Jan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국에서 너의 친구들이 왔으니 하루 동안 통역 알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얀 역시 내게 배운 농담을 잊지 않았다.,

“알았어, 싸창님, 십 분에 촌만원.”


잠시 후 메이 브릿 가족이 로비로 내려왔다. 그들에게 정사장과 얀을 소개했다. 설명을 들은 메이 브릿은 배려에 감사하다며 정사장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얀은 모처럼 만나는 고향 사람들과 금방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이제 출발 준비가 끝났다. 모두가 긴장되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메이 브릿은 말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쉽게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홍채 사장님의 차(위), 마산 애리원(아래)


호텔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드디어 마산 애리원에 도착했다. 일행이 차에서 내렸다. 메이 브릿이 건물을 훑어보았다.

“I don't remember anything. 아무런 기억이 없어요.”

당연한 말씀. 기억이 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말해주려다 참았다.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들은 내가 죄송할 정도로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곧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메이 브릿은 어제 내게 했던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차분한 어조로 선생님들에게 설명했다.

나의 통역이 끝나자 실장 선생님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다음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애리원을 찾아준 것에 대한 감사, 메이 브릿에 대한 위로,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실장님은 이내 난감한 얼굴이 되어 다음 말을 주저하는 눈치였다. 무슨 내용이라도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고 내가 눈짓을 했다.


참 유감스럽지만, 애리원에 불이 났었습니다. 1980년에요.
그때 모든 자료가 불타버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메이 브릿보다 내가 더 실망했던 것 같다. 그녀가 통역을 기다리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 표정을 통해 이미 실장님의 말을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메이 브릿 역시, 무슨 내용이라도 좋으니 편하게 말해달라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메이 브릿, 유감스럽게도, 어떠한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군요. 1980년도에 화재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May Britt, unfortunately, there is no data left. This is because there was a fire accident in 1980.”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얀을 통해 실장님의 말을 전해 들은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애리원도 한국 전쟁 이후 꽤나 많은 고아들을 홀트 재단을 통해 해외로 입양 보냈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슬픈 시대의 엄연한 현실이었지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그나마 불타지 않고 남았던 약간의 자료들조차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메이 선생님이 우리 애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저도 참 궁금합니다.”


실망하는 그녀의 가족들이 안타까웠는지 실장님은 그 자리에서 홀트 재단에 직접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러나 곧 전해진 대답은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메이 브릿과 관련된 자료는 없습니다. 그녀와 마산 애리원의 연결 고리 또한 저희 홀트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담당자가 메이 브릿에게 왜 마산 애리원을 알려 주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분, 오래전에 퇴사하셨거든요.”




아쉬운 마음으로 애리원을 나와야 했다. 선생님들이 마당에까지 나와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마산 시청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애리원과 관련된 자료가 어쩌면 시청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이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애리원 선생님들 못지않게 친절한 시청 직원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애리원의 옛날 주소 외에 메이 브릿과 관련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점점 생겼다. 현직 경찰인 고교 동창의 조언을 듣고 이번엔 마산 경찰서로 향했다. 감사하게도 민원실의 거의 모든 직원들이 달라붙어 그녀와 관련된 자료를 뒤졌다. 나중에는 1976년 10월 22일생, 김수영으로도 당시의 실종 신고나 미아 정보를 조회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잔뜩 실망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당연히 메이 브릿이었다.

“Jay, that's enough. What I wrote is the correct answer until grading. Since there is no more data, everything I know will be correct. Don't be disappointed. And thank you. 제이, 이제 됐어요. 채점하기 전까지는 내가 쓴 것이 정답이에요. 더 이상 어떠한 자료도 없다고 하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정답일 거예요. 실망하지 말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우리 일행은 할 수 없이 부산으로 돌아왔다. 역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호텔에 도착했다.

메이 브릿 가족은 달랑 하루 일정으로 부산에 왔기 때문에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하루 더 머물 것을 제안했다. 그대로 보냈다간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았다. 숙박비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덴마크로 돌아가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쉬웠다.

호텔 마당에서 그녀의 가족들 모두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알프레도가 내 손을 잡으며 서툰 말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메이 브릿은 나를 껴안고 한동안 놓아주지를 않았다. 또 뭉클해졌다. 정사장이 마찬가지로 부산역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차에 오르기 전, 메이 브릿이 작은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Check the contents after we leave. It's how my family feels about you. 우리가 떠나고 나면 확인하세요. 이것은 당신에 대한 우리 가족의 마음입니다.”


그녀의 가족을 태운 차가 호텔 마당을 빠져나갔다. 큰길로 접어들어 더 이상 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한참 뒤까지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공연히 화가 났다. 문득 생각이 나서 메이 브릿이 주고 간 가방을 열어 보았다. 노트 한 권과 만년필 세트가 들어 있었다. 언제 이걸 준비했을까? 노트의 겉장을 넘기자 빼곡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가족들이 다 같이 내게 쓴 편지였다.


메이 브릿 가족들의 편지가 담긴 노트


공교롭게도 노트의 표지에는 ‘기록, 기억’이라고 적혀 있었다. 메이 브릿이 한글을 알 리가 없다. 기억조차 없는 모국母國을 사십 년 만에 방문해서,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자신의 출생 기록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썼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참으로 아이러니한 노트의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 기억. 두 단어가 한동안 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그녀의 가족은 서울을 거쳐 한국을 떠났다.




다시금 정신없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평소처럼 내게 인사 메일을 보내고, 즐거운 기분으로 호텔을 다녀갔으며, 귀한 선물로 무사 귀국을 알렸다. 그렇게 대략 한 달이 지났다. 메시지 노트를 체크하는데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띄었다.

Send : May Britt 

아, 메이 브릿에게서 온 소식이구나. 그새 또 그녀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굵은 글씨의 제목이 눈을 먼저 치고 들어왔다.

Title : Jay, help me!

헬프?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서둘러 메일을 열었다.


Jay, Holt suddenly sent me a document. But it's all written in Korean. I really need your help.
제이, 홀트가 갑자기 서류 한 장을 내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모두 한글로 적혀 있어요. 당신의 도움이 급히 필요합니다.


홀트가? 갑자기 뜬금없이, 이번엔 대체 뭐지? 떨리는 마음으로 첨부 파일을 클릭했다. 그러자, 아주 오래된 누런 종이를 스캔한 이미지 하나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그것의 상단부 제목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 욕은 당연히 숫자로 된 것이었다.


(3부에 계속)




Image by Arek Soch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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