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을 몽땅 잃어버린 병철이는 아까부터 볼따구가 불룩했지만, 그와 반대로 명수는 제 세상인양 한껏 신이 났다. 개평이랍시고 몇 개를 돌려주려 했지만 병철이는 받을 시늉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민 주먹을 걷어들여 구슬을 도로 주머니에 담던 명수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어른들은 뭐하고 놀까?”
꽤나 낯선 궁금증이었다. 질문을 던진 명수도, 듣고 있던 병철이와 나도 잠시 동안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노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아버지들은 과연 놀기라도 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곧장 일터로 나가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어둑해진 뒤에야 돌아왔다.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혹시 우리 아버지는 친구가 없는 것일까? 친구가 있다면, 만나서 무엇을 하고 놀까? 우리는 공도 차고 구슬치기도 하는데 어른들은 대체 뭘 하고 놀까?
“술 먹고 화투 치며 논다.”
여전히 골이 난 병철이가 남의 말하듯 툭 내뱉었다. 병철이 아버지와 일을 함께 하는 아저씨들 몇몇이 지난 일요일에 자기 집에서 그렇게 놀다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공감할 수는 없었다. 명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나는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였다. 전부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답을 하려는데 병철이가 못을 박았다.
“어른들은 우리 안 보는 데서 자기들끼리 논다.”
“아빠는 친구들과 만나면 뭐하면서 놀아요?”
뜬금없는 질문하기는 유전인 것 같다. 저녁 식사 도중에 아들이 불쑥 물었다.
“특별한 게 뭐 있겠니? 여행 가고, 등산 하고, 그냥 이야기도 하고.”
“보통 무슨 이야기 하세요?”
취조받는 기분이다. 깔깔거리며 웃는 어른들의 모습을 커피숍에서 볼 때면,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재미나게 하는 걸까 몹시 궁금하더라는 말을 아들이 덧붙였다.
“별것 없어. 그냥 정치 이슈나 연예인 가십, 아니면 옛날 친구들 이야기 정도? 근데 그걸 왜 물어?”
"어른들끼리는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요."
내 답이 시원찮다는 표정의 아들은 궁금한 게 남은 듯했지만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본가에 머무르는 주말 동안 아버지의 스마트 폰을 열어 보았다. 유익한 어플을 깔아드릴 생각이 우선이었고 아버지도 모르는 사이에 스팸 메시지와 악성 어플이 깔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뜻이 두 번째였다. 카톡부터 확인하려는데 맨 위의 대화창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김영수 어르신은 올해 여든둘 되신 아버지의 절친이다. 두 분은 자타공인 경로당의 얼리어답터답게 이미 카톡으로 꽤 많은 대화를 주고받으셨다.
친구분들과 화투 치는 어르신을 아버지가 놀렸다. 오후 세 시 즈음 아버지가 보낸 메시지에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야 답이 왔다. 돈을 잃었다 하니 속 시원하다고 어르신을 놀리는 아버지, 아홉 시가 되기 전인데도 일찍 잘 것을 당부하는 어르신의 인사. 이것이 내가 미처 몰랐던, 그러나 그 나이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팔십의 대화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구체적인 화제話題와 놀잇감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넓은 테두리에서 보면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서른에는 서른의 이야기, 마흔에는 마흔의 놀이, 그리고 오십에는 오십에 맞는 이야기가 그때그때 아버지와 함께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처럼 음담패설과 욕설이 듬뿍 섞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들만의 대화와 놀이가 있다. 창규네 담벼락에서 놀던 우리도 그랬고, 화투를 치며 술을 마시던 병철이 아버지도 그랬다. 그다지 영양가 없는 이야기와 함께 애먼 커피를 축내는 지금의 우리가 그렇고, 한 판에 백 원짜리 화투치기로 소일하는 팔십 넘은 아버지의 친구들이 그렇다. 내가 팔십이 되면 무엇을 하며 놀게 될까,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이제까지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두 분의 카톡으로 미루어 보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나이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인생의 질문, 그리고 해답이 거기에 있다.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관리 잘하셨다고 했더니 전화기를 돌려받는 아버지의 표정이 환해진다. ‘킹’이 아버지의 별명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것 또한, 내가 미리 알 필요가 전혀 없는 팔십 어른들만의 대화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