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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Sep 02. 2021

오십 년째 노안입니다

얼굴과 눈, 그 사이 어디 즈음


EP. 1


명수가 월요일 아침부터 투덜거렸다. 지난 토요일, 온천 극장에 ‘변강쇠’를 보러 갔는데 검표원에게 걸려서 입장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신분증을 보자는 말에 우물쭈물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았고, 고등학생이면 대학 갈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덕담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했길래 영화관 입구에서 입장 불가로 걸리는 걸까?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변강쇠는 물론 애마부인, 산딸기, 깊고 푸른 밤 등등, 당대의 성인 영화가 절찬 상영 중인 모든 극장에서도 나는 언제나 무사통과였다. 신분증을 확인해 보자는 말조차 없었다. 명수와 똑같이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 시대를 살고 있는, 파릇파릇 고등학생인데도 말이다.

실망한 명수를 위로하려고 며칠 뒤, 동성 극장에 함께 갔다. 영화 제목은 이미숙 주연의 ‘뽕’이었다.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입장했고, 명수는 전과 마찬가지로 걸렸다. 출입구를 지나서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힌 명수가 나를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명수의 입 모양이 뚜렷이 보였다.  

“저 녀석도 내 친군데요, 왜 나만, 씨.”


EP. 2


대학 입학 후 첫 수업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새로 산 이랜드 재킷은 어색했고, 랜드로버 단화는 미처 익숙해지지 않아 발목이 약간 시큰거렸다. 걸음걸이가 불편했고 느렸다. 그 때문에 아침 일찍 서둘렀음에도 시작 시간이 얼추 다 되어서야 겨우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용히 들어가자 싶었는데 하필이면 앞문을 열었다. 좀 전까지 들려오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는 일순 조용해졌다. 나는 교탁의 뒤를 돌아 맨 앞줄에 놓인 책상에 조용히 앉았다. 다행히 교수님도 조금 늦는 모양이었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전공 서적을 훑어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뒤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학생이 서 있었다. 공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그가 내게 말했다.

“저, 교수님. 수업 시작 안 하십니까?”


EP. 3


군 복무 시절, 나는 대대장의 차를 담당하는 1호차 운전병이었다. 92년 그해 가을, 우리 부대의 대대장은 새로 부임한 상급 부대의 지휘관들이나 지역 유지들과의 저녁 모임이 유난히 많았다. 약속 장소는 주로 경주 천마총 옆에 자리한 ‘명월’이라는 한정식 집이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명월로 향했다. 대대장은 평소에도 뒷자리가 아닌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서 나와 대화하는 걸 즐겼다. 그날도 그랬다. 차는 금방 명월 마당에 도착했다.

운전석의 문을 열고 내리는데 저만치서 누가 달려온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다. 내 앞에 선 그녀가 상체를 숙이며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대대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새로 온 김 마담이에요.”

당황스러웠다. 이, 이쪽 아닌데... 옆을 돌아보았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대대장이 허리를 젖혀가며 웃고 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곤 했다.

“아버지, 저는 왜 이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거죠? 친구들이 영감이라고 놀려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는 니가 남들보다 훨씬 더 젊게 보일 거다. 절대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거울보다 내가 더 빨리 늙었다.

“아버지, 이제 그 나이가 되었는데 얼굴은 여전히 제 나이보다 앞서가고 있어요. 나이가 들면 내가 친구들보다 더 젊어 보일 거라 하셨잖아요?”

불평의 빈도와 강도가 늘어갈 때면 아버지는 서둘러 태세 전환을 했다.

“자기 나이보다 중후하게 보이면 얼마나 좋노? 사람들이 우습게 보지도 않고, 하하, 하하하.”

우리 아버지는 거짓말쟁이, 공산당, 김일성.




고교 입학식날, 담임 선생님은 내게 먼저 인사를 했다. 신입생과 함께 온 삼촌인 줄 알았다고 했다. 신입 사원 연수 첫 날, 동기들은 나에게만 유독 말을 높였다. 경력 사원인 줄 알았단다.

스물에는 서른 즈음으로 보였고, 서른을 넘겼을 땐 마흔이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나이 들어 보인다, 늙어 보인다, 노안이다라는 말이 그때의 내겐 꽤나 치명적인 상처였다. 원숙하고 노련해 보인다는 칭찬도 간혹 섞여 있었지만 순도 백 퍼센트가 아님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름의 노력은 해야겠다 싶어 아내의 도움을 받아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는 옷차림을 하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실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더 쳐주는 것이 내 얼굴에 형성된 적정 시세였다.


마흔이 되었을 땐 아뿔싸 흰머리마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새치라고 우겼다. 아내는 솔직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인정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눈에 띄는 밝은 색으로 부탁했다. 하지만 염색에는 여러 부작용이 따랐다. 무엇보다도 따로 긴 시간을 내야하는 번거로움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이삼 년 뒤부터는 다달이 하던 염색마저도 거르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여름에도 녹지 않는 하얀 만년설이 내 머리에 자리한 지 이미 오래다.


단골이 된 지금의 미용실 원장은 절대로 염색하지 말 것을 매번 내게 당부한다. 흰머리, 백발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대로 두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진심 담긴 칭찬이다 싶어 기분이 좋아질 즈음에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끼어있던 말을 가끔 던져본다.

“그렇잖아도 늙어 보이는데 흰머리까지 덮여 있으면 좀 심한 것 아닐까요?”

사연 은 노안이 염색을 하려는 이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원장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동안은 동안대로 또 걱정이 많답니다.”

나보다 한 살 적은 그녀는 심지어 눈에 띄는 동안이다. 그녀의 한숨은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 때가 있다. 과연 그럴까? 동안도 불편한 것이 있을까? 제 아무리 불편해도 동안으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진짜다.




일 년에 한 번씩 시력 검사를 하고 안경의 도수를 조정한다. 지난주 목요일, 안경점을 방문했다. 인상 좋은 안경사가 간단한 검사를 마치더니 대뜸 그런다.

“노안이 심하시네요.”

당연히 눈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늙어 보인다는 말, 자주 듣습니다.”

첫인사에 농담을 섞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안경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많이 불편하셨겠어요, 그동안.”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모든 질문이 그렇게만 들린다. 체념하듯 대답을 했다.

“그 불편함,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잠시 후, 안경사가 새로 착용할 렌즈의 샘플들을 들고 와서 내게 설명을 했다.

“이건 노안을 극복하는 신상품입니다. 시험 삼아 한번 착용해 보시겠어요?”

노안 극복?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웃기는 상상이 잠깐 스쳤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한껏 밝은 목소리가 되어 안경사에게 말했다.

“그것 참 좋네요. 노안을 극복한다는데, 당연히 사용해야죠.”

안경사가 웃는다. 나도 환하게 웃어준다. 내가 그렇게 웃는 이유를 안경사는 절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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