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Sep 14. 2021

아내의 몽타주

누구냐, 넌!


아침 등굣길에 홍석이가 우연히 담배 한 갑을 주웠던 모양이다.

뜻밖의 횡재에 신이 난 홍석이는 교실에 오자마자 단짝 주영이를 데리고 학교 건물 뒤 쓰레기 소각장으로 달려갔다. 무상 획득한 전리품으로 둘만의 우정을 재확인하겠다는 뜻이었을 게다.

선생님들 출근하기 전의 이른 시각이니 들킬 염려는 눈꼽만큼도 없겠다 싶어서, 홍석이와 주영이는 마음을 푹 놓고 갖은 폼을 잡으며 신나게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 거기 두 놈! 지금 뭐 하는 거야!”

난데없는 불호령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뿔싸, 저만치서 교장 선생님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처 불을 끌 생각도 못하고 두 녀석은 피우던 담배를 그대로 던져 버리고는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날쌔기가 바람과도 같은 열여덟 살 적토마 두 마리를 교장 선생님이 따라잡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분을 참지 못한 교장 선생님은 불이 붙어있는 담배꽁초를 조심스레 주워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때마침 출근하던 체육 선생을 만난 교장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빨리 가져오라고 했다. 재킷 안에서 볼펜을 꺼낸 교장 선생님은 종이를 받아 들고 슥슥 삭삭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펜이 종이를 떠나기도 전에, 이 녀석을 잡아 오라는 지시를 하기도 전에, 곁에서 보고 있던 체육 선생이 먼저 말했다.

“어? 이거 이학년 삼반 장홍석이네?”


삼십 분 뒤 주범 장홍석과 공범 노주영은 교무실에 끌려왔다. 그들의 뺨이 이미 벌겋게 부어 오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담배꽁초에 선명하게 남은 이빨 자국까지 그대로 종이에 그려진 탓에 두 녀석은 순순히 범행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홍석이와 주영이는 교장 선생님의 전공이 미술이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학교 골초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불문율이 전파되었다. 담배를 피우다가 만일 교장 선생님에게 들키면,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무릎부터 꿇어라.


이것 지금도 고교 동창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1988년 장홍석 몽타주 사건'의 전말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벌써 한 달이 되었다. 이쯤 되니 주말부부들의 애환을 들려주시는 작가님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이전보다 더 자주 아내와 통화를 하고, 더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게 된다. 지난 월요일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아내의 연락을 받았다.



지하철에서 아내가 유명 탤런트를 마주했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했어도 그 위로 드러난 짙은 눈썹과 돋보이는 콧날이 예사롭지 않더란다. 그런데 얼굴은 분명히 알겠지만,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기분, 나도 잘 안다. 몰래 사진이라도 찍으라고 했더니 정면에 앉아 있는 탓에 그건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아내가 묘수를 냈다. 배우의 얼굴을 그려서 보내겠다는 거다. 잠시 기다렸다.


알람이 느껴졌다. 다시 창을 열었다. 아내가 그림을 보냈다. 확인했다. 그런데 아뿔싸다. 이건 진짜 아뿔싸다.


누구냐 넌


이렇게 생긴 배우가 정녕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신의 그림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시선을 피해 몰래 스마트폰에 그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그러나 실물과 똑같은 판박이라는 자신감을 아내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내의 힌트를 취합하면 그는 대략 이런 배우다.


회장, 임금, 장군, 왕으로 자주 출연한다

눈 사이가 좁다

쌍꺼풀이 진하다

나비넥타이를 자주 한다

박 씨가 아닐 수도 있다

이름에 ‘병’이 들어가는 것 같다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정답을 알아내서 자기한테 연락하란다. 그것이 아내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렵다. 아내는 내 성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답을 찾을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것을 말이다. 회의하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 종일 그것에만 매달렸다. 과연 이 배우는 누구일까? 그러나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일과를 마친 시각이 되었다. 답을 알 수 없으니 혹시 다른 힌트라도 생각나는 것이 없는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때 아내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누군지 알았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내가 더 반가웠다. 누구냐고, 나도 정말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내가 대뜸 그런다.


“맨 입에? 얼마 줄 건데?”


아니, 세상에. 이건 아내의 탈을 쓴 고리대금업자도 아니고. 자신이 몰라서 물어본 것의 답을 내게 알려주는 조건으로 반대급부를 요구하다니. 주말부부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몰라도 된다. 누군지 몰라도 나는 상관없다. 당신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이니까, 이제 해결되었으니까 속 시원하겠네, 라며 이죽거린 다음 대화를 마쳤다. 그런데 그때부터 궁금증의 쓰나미가 시작되었다.


그저 웃지요 허허허


아내의 그림을 더듬다 보니 삼십 년 전 몽타주 전문가로 회자되었던 교장 선생님이 생각났다. 선생님께 보여드려 범인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참으로 궁금한 저녁이었다.




Image by Sunshine Land, Non-San, Korea

매거진의 이전글 오십 년째 노안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