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엄마가 싱글벙글이다. 일주일 만의 재회가 저 정도로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의 아들로 대략 오십 년을 살아본 내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저런 표정은 분명, 들려주고 싶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엄마는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다. 내가 성냥을 그어야만 불이 붙는다.
엄마의 웃는 얼굴만으로도 그저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전혀 궁금하지 않은 척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장화 신은 고양이의 간절한 눈망울에 현혹되어버린 나는, 어차피 예정되었던 궁금함의 방아쇠를 조금 일찍 당겨 주었다.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어요?”
옳지. 여태껏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내 방까지 따라온 엄마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딴 게 아이고, 아까 낮에 말이다.”
금요일 오후, 복지관 봉사 활동을 마친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외국인이 엄마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스크를 꼈지만 그가 외국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 큰 키와 바람에 찰랑거리는 금발 때문이었다.
스마트 폰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곧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를 여러 차례. 보아하니 이곳 위치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하, 휴대폰 속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달라서 저러는 거구나.’
부산은 지금 도심 여기저기서 버스 중앙 차로제(BRT) 시행과 관련된 많은 공사를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버스 노선이 바뀌거나, 기존 정류장이 폐쇄된 후 임시 정류장이 생긴 경우도 많았다. 지금 서 있는 정류장도 그중의 하나였다. 변경된 정보가 제때 반영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정확한 스마트폰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한국인도 헷갈리기 십상인데 하물며 외국인은 오죽할까?
엄마는 주저 없이 외국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헬로, 헬프 유.”
그러자 외국인이 반색하며 엄마에게 스마트폰을 냉큼 보여주었다. 위치가 조금 옮겨지긴 했어도 사진 속의 버스가 멈추는 곳은 지금 여기가 맞다. 엄마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스, 여기 오케이.”
때마침 저만치에서 그가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었다. 엄마는 다시금 손을 뻗어 버스를 가리켰다.
“유, 저 버스, 고.”
고개까지 숙여가며 캄사합니다를 되풀이한 외국인은 곧 버스에 올랐다. 차 안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손인사로 맞받아주었다. 곧 버스가 출발했다.
그때까지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새삼 존경하는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 문장은 송 여사님의 지극히 주관적인 진술입니다. 특히나 ‘존경하는 눈빛’ 이 표현은…)
“정말요? 와아, 우리 엄마 진짜 대단한데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길에서 외국인들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게 되면 나 역시 당황하는데, 스스로 먼저 다가가서 도와주었다 하니 참으로 대단하고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칭찬에 엄마의 어깨는 한껏 더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흐뭇했다. 만족할만한 반응을 얻었다 싶었던지 의기양양하게 방을 나서던 엄마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심해서 잘 가라, 하는 말도 배웠어야 했는데, 윽수로 아쉽네.”
집에 다녀갈 때마다 엄마의 스마트 폰을 잊지 않고 확인한다. 불량 어플 삭제와 메모리 정리가 목적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시작한 김에 이것저것 열어본다.
'어디 보자. 엄마는 주로 무엇을 찾아 보시나?'
별다른 생각 없이 확인해 보려던 검색 기록이었다. 하지만 곧 몇 개의 검색어에 시선이 멈춘다. 나는 깨닫는다. 아, 그랬던 것이구나. 정류장에서 외국인을 만났을 때, 즉흥적으로 나온 손짓발짓 콩글리시가 아니었구나. 배움이 짧은 것이 평생의 한恨이라는 엄마는 혼자서 스마트 폰으로 영어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굿모닝, 외국인 만나면 뭐라고, 쉬운 영어
엄마는 아까부터 벽을 힐끔거리며 시각을 확인하고 있다. 경로당에 간 아버지가 돌아올 때를 가늠하는 것이다. 낮의 일을 아버지에게 말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무용담을 듣게 될 아버지의 반응 또한 익히 예상되는 바이다.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피식 코웃음을 침으로써 아버지는 엄마의 잘난 체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음을 강하게 피력할 것이 분명하다. 서둘러 새로운 단어 하나를 엄마에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중에 아버지 반응은 어떨까요?”
“보나 마나 거짓말이라고 나를 무시하겠지.”
“그때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그 말에 장화 신은 고양이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는 미국 동부 엘레이 본토박이 발음으로 천천히 말한다.
“헤이, 유, 겟 어웨이!”
엄마가 그것을 한 마디씩 따라 한다. 게더웨이, 게더웨이. 뜻을 설명해주자 엄마가 씨익 웃는다.
발음은 정확하지 않아도 좋다. 말의 의미와 그 속에 담긴 느낌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된다. 팔십 엄마가 아버지에게 스피크 잉글리시 하겠다는데 그깟 발음쯤, 이 대목에서 무시해도 전혀 상관없다. 암, 상관없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