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삼십 년 동안 근속勤續한 것에 대한 서훈이라고 했다. 개근상과 다를 바 없다며 애써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하지만,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낫다는 말로 어린 동생들을 독려했던 것은 바로 누나 자신이었다.
장관과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이름이 함께 찍힌 훈장증을 받아 든 엄마는 사진을 찍은 뒤, 몇 번이고 상장을 쓰다듬다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 모습에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그랬다.
“마침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첫 발령에 좋아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모든 것이 그 선생님 덕분이다.”
그렇다. 우리 가족이라면 그 말에 담긴 뜻을 모를 리 없다. 그때 겨우 열 살에 불과했던 나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보정해가며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사십 년 전의 그날로 돌아간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대문이 열렸을 때 여동생은 갑자기 일어나 인디언 춤을 추었고, 나는 뜬금없이 앞구르기를 두 번 했다. 누나가 돌아와야만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춤과 앞구르기는 오랜 기다림과 진정 반가움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곧장 철컹하고 문이 닫혀야 했지만 그날따라 누나는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않고 대문간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누나의 뒤로 여전히 열려있는 문 밖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것을 내가 먼저 보았다. 틀림없이 나쁜 놈이 누나를 따라온 모양이다. 얼른 엑스칼리버와 방패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누나가 한참 만에 몇 걸음 들어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담임 선생님 오셨어예.”
마루 한쪽에서 신문을 보던 아버지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고,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는 손을 닦으며 황급히 달려 나왔다. 아버지가 대문께로 달려가 선생님을 맞이했다.
“하이고, 선생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무슨 일인가 싶어 주인집 정훈이 엄마가 창문 너머로 내다보았다. 중학교 삼 학년이던 누나의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은 1980년 가을,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형편이 이래 갖꼬 선생님 대접할 것이 시원찮습니더. 이해해 주이소.”
서둘러 가게에 다녀온 엄마가 잘 깎은 사과 한 접시와 환타 한 병을 선생님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아버지 등 뒤에 숨다시피 앉아서 거품이 뽀골뽀골 올라오는 유리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닙니다. 미리 말씀도 드리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제가 더 결례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다음, 선생님은 제대로 말을 꺼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시작한 선생님은 화가 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선생님,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희 사는 형편으로는 이 아이를 인문계에 보낼 수 없습니다.”
“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아버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알고 계시면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인문계 보낸다고 허락만 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학교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학교에서 알아서 하다니요, 그게 무슨?”
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엄마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나는 처음부터 선생님의 말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환타가 먹고 싶어 그저 미칠 지경이었다.
아버지, 엄마의 뼈를 깎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도처에서 진행되는 재개발 열풍을 보면 아버지 역시 일생일대의 반전을 기대해 볼만도 했지만, 1979년에 일어난 2차 석유 파동은 또다시 우리 가족의 발목을 틀어잡았다.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한 이후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했다. 이웃에서 쌀을 빌려와 밥을 하고 푼돈을 빌려 장을 보았다는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듣게 된 이야기다.
나보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는 그래서 일찍 철이 들었다. 조금씩 모아둔 용돈으로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부모님 몰래 주산 학원에 다녔다.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취업을 할 계획이었다. 나와 여동생을 뒷바라지하고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삼 학년 여름 방학이 되기도 전에 누나는 주산과 부기 3단 자격증을 이미 따놓은 상태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정식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누나는 본인의 뜻대로 실업계 진학을 희망한다고 써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우수한 성적이 오히려 문제였다. 중학교 삼 년 동안 전교 일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누나가,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 상업학교로 가겠다고 하니 담임 선생님은 도저히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누나를 따로 불러 설명을 듣고 다시 설득하기를 여러 차례, 하지만 아버지도 당하지 못하는 누나의 고집을 선생님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누나를 앞세우고 그 늦은 시각에 부모님을 직접 만나러 온 것이었다.
“인문계로 보내겠다고 말씀만 해주시면 따님의 고등학교 삼 년 동안 학비는 학교에서 전액 지원하겠습니다. 아버님,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말에 엄마는 소매 깃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 역시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선생님과 누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염치없고 부끄러운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만...”
“아버님, 제가 아니라 학교에서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승낙을 받아 오라는 것이 교장 선생님의 명령입니다, 명령.”
담임 선생님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교장이 무슨 수로 일개 학생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아버지는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한숨과 함께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생각은 들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누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들었제? 못난 아비가 할 소리는 아니다만, 니 생각은 어떻노?”
여태껏 말없이 앉아만 있던 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나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누나가 우는 것을 보니 갑자기 나도 슬퍼져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누나가 한 말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인문계 보내주세요. 저는 공부가 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자 선생님이 갑자기 앉은 채로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아버지가 급히 선생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날 밤 아버지는 선생님과 밤이 늦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억지로 버텼지만 환타는 한 모금도 얻어먹지 못하고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81년 봄, 누나의 고등학교 입학식에는 엄마만 참석했다.
재학생과 신입생들로 가득한 학교 운동장에서 행사가 진행되었고, 축사를 하기 위해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 오른 때였다. 그 순간, 엄마는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장 선생님이 여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경남여자고등학교 황순조 교장 선생님. 엄마는 문득 깨달았다고 했다.
‘아, 교사가 되면 여자라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구나. 그렇다면 내 딸도 반드시 선생으로 만들어야겠다.’
엄마의 뜻은 고스란히 누나에게 전달되었다.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공부한 누나는 부산교육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발령 지역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뿐, 서울대를 가고도 남을 점수라고 했다. 4년 후, 누나는 부산 개금 초등학교에서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삼십 년이 조금 더 되는 긴 시간을 줄곧 평교사로만 근무했다.
“다행히 이듬해부터 일이 잘 풀려서 중학교에서 주겠다는 장학금은 안 받아도 되었지.”
“그래도 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인문계 보낼 생각은 절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와 엄마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나의 시간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딸로, 누나로, 언니로, 반장으로, 학생 회장으로, 부부 교사로, 교사의 엄마로, 종가宗家의 맏며느리로 살면서 누나는 그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교사의 위상과 사회적 인식이 바닥으로 추락한 때조차 누나는 그런 것들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급식이 없던 시절, 점심을 굶는 반 아이들을 위해 매일 열두 개의 도시락을 싸갔던 누나다. 가정 폭력으로 쫓겨난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보호자로 이름 올리기를 자처했던 누나다. 월급 나오는 여유로운 한 달 휴가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여름이나 겨울이나 긴긴 방학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결손 가정 학생들을 교실로 불러 돌보았던 누나다. 정년이 몇 년 남았음에도 그간의 과로로 인한 청력 손상, 행여 그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문제가 될까 싶어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당당한 명예퇴직을 선택한 누나다. 대통령과 장관이 주지 않았더라도 내가 나서서 상을 주었을, 자랑스러운 교사 누나의 값진 삼십 년. 누나가 훈장을 받는 것이 내가 부산에 있을 때라서 더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있는 아내는 누나에게 ‘진심 존경한다’는 축하 인사와 함께 또 다른 메시지를 보내왔다.
“형님, 그럼 이제 뭐하실 거예요?”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누나는 이제부터 하나씩 해 볼 것이라고 한다. 뭉뚱그려 ‘취미 생활’이란다. 맨 먼저 시작한 취미 생활은 우선 이비인후과 진료와 함께 필라테스 운동이다.
글을 써 보는 건 어떻냐고 내가 물었다. 나의 글쓰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만큼 누나의 작문 실력은 일반인의 수준, 훨씬 이상이다. 하지만 굳이 브런치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행여 누나가 여기에 들어와 그동안 내가 끄적거려 놓은 것을 본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누나가 학생들에게 제일 많이 했을 문장으로 말이다.
“너, 앞으로 나와.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누나의 시간들을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 앞이 흐려진다. 일부러 허튼소리를 섞어보지만 효과가 시원찮다. 행여 누나가 볼까봐 서둘러 글을 마친다. 한마디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