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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Sep 01. 2021

자두의 추억

주미야 주미야


주미.


단정하게 땋아 내린 양갈래 머리와 그 끝에 매달린 빨간 방울, 오뚝한 코 위에 살짝 올려진 동그란 안경이 인상적이었던 주미는 오 학년 때의 우리 반 여학생이었다. 희정이만큼 예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못난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숙제를 안 해서 벌을 서거나 시험 점수가 나쁘다고 꾸지람을 듣는 경우도 드물었으니 공부도 나름 잘했던 것 같다. 딱히 눈에 띄는 어긋난 행동을 하지도 않고, 앞에 나서는 법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했던 주미가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승철이와 만성이 때문이었다. 두 녀석은 주미의 성姓이 다름 아닌 ‘오’씨인 것을 집요하게 놀려댔다.




슬그머니 주미 옆으로 다가간 승철이가 시익 웃으며 나지막이 말한다.

“오주미.”

그러면 옆에 섰던 만성이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는다.

“마려워요.”

곧 두 녀석이 박자를 맞춰 합창을 한다.

“오주미 마려워요. 화장실에 가야지요.”




그랬다. 주미의 성은 ‘오’씨였다. 우연히도 합이 맞아버린 성과 이름은 승철이와 만성이에게 아주 좋은 놀잇감이 되어 버렸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처음엔 읍소를 하기도 하고, 나중엔 애써 무시도 해 보았지만 녀석들의 짓궂은 장난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주미는 책상에 엎드려 울 때가 많았다. 보다 못한 몇몇이 그 사실을 선생님에게 알려 혼이 날 때도 있었지만, 두 녀석은 주미 놀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주미, 마려워요. 화장실, 갈래요.

선생님이 “오주미”하고 출석을 부르면, 주미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귓가에 ‘마려워요’라는 소리가 먼저 들리는 듯했다. 녀석들이 주미를 놀릴 때마다 덩달아 킥킥대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승철이와 만성이를 제지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승철이와 만성이와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여름 방학은 그래서 주미에게는 참으로 편안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길었던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 9월 1일 오늘 아침, 주미는 또 고개를 파묻고 있다. 그 책상머리에 승철이와 만성이가 버티고 있음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개학 날의 어수선함에 맞물려 그지없이 왁자지껄한 교실, 선생님마저 자리를 비운 난장판의 한가운데에서 두 녀석은 그 어느 때보다 신이 난 채로 주미를 놀려대는 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방학 동안 옆집 복태 형에게서 권투를 배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아서는 안 된다던 태권브이 김박사님의 유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던 울보 주미에 대한 동정심과 보호 본능이 끝내 발동해서였을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나는 소리부터 질렀다.

“그만 좀 해라, 이 새끼들아!”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만 하라고, 임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알았어, 미안해’ 하며 꼬리를 내릴 녀석들이 아니었다. 승철이가 욕을 던지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니가 뭔데, 니가 오주미 남자 친구라도 되나?”

만성이가 뒤를 거들었다.

“그럼 니는 오주미라 하지 말고 그냥 주미라고 부르든가.”


그, 그건 안될 말이었다. 홍길동을 길동으로, 성춘향을 춘향으로, 오주미를 주미로 불러서는 절대 안 된다. 아무리 주미 편을 든다고 해도 오주미를 그냥 주미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불렀다간 금세 얼레리 꼴레리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른다는 것, 그것은 그 시절의 우리에겐 더할 수 없는 금기禁忌였으며 이학기 내도록 놀림이 되는 것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저 녀석들부터 제압해야 할 상황이다. 다시 버럭 고함을 쳤다.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히는 것이 그렇게 재밌…”

미처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승철이가 나를 향해 냅다 발을 뻗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살짝 피하며 책상을 밟고 공중으로 가볍게 날아오른 다음, 몸을 한 바퀴 돌려 필살의 가위차기로 승철이의 명치를 향해 발을 날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승철이의 발에 차여 나는 속절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복태 형에게서 여름 내도록 배운 잽잽 훅훅은 전혀 실전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승철이와 한참을 툭탁거리는데 이번엔 만성이까지 발길질로 거들었다. 서로의 멱살 드잡이를 하다가 결국 바닥에 구르는 꼴이 되어버렸다. 주먹보다 더 많은 욕설이 각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숫자가 들어간 조금 더 센 욕, 딱 한 개만 있으면 충분히 두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옳지, 그게 있었지. 하지만 난데없는 담임 선생님의 일갈이 내 입을 먼저 틀어막았다.

“당장 그만 두지 못해?”


승철이와 만성이에게 불호령이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개학 첫날부터 주먹다짐을 한 나 역시 벌 청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에게 욕을 해가며 억지 청소를 겨우 마쳤다. 그리고 녀석들에게 옷깃을 잡힌 채 학교 뒤편의 소각장으로 끌려갔다. 학교의 잔일을 도맡아 하는 소사 할아버지의 때를 맞춘 등장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승철이와 만성이는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학교 계단에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해가 질 때 즈음에서야 겨우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다음날 아침, 어떤 아줌마가 학교에 다녀갔다. 아이들 말로는 주미의 엄마라고 했다. 승철이와 만성이는 혹시라도 교무실에 불려가 또다시 혼이 나는 건 아닌지 염려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날 오후 수업이 마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처럼 선생님에게 청소 검사를 받고 교실을 나설 때였다.

“임진우.”

돌아보았다. 주미였다.

“와? 뭣 땜에 부르노?”

퉁명스럽게 물었다. 주미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작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뭔데?”

“열어보면 안다. 내가 가고 나면 그때 봐라.”

주미는 급히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콩콩콩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제법 오래도록 들렸다.

조심스레 봉지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빨간 자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툭 한마디가 나왔다.

“가시나, 웃긴데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승철이와 만성이는 더 이상 주미를 놀리지 않았다. 얼마 후엔 그전처럼 녀석들과 축구를 하며 어울려 놀았다. 이어진 이학기 동안 주미와의 특별한 기억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희정이는 여전히 콧대가 높았고, 주미는 변함없이 그저 조용했다.

다만, 주미가 준 자두만큼은 꽤 오랫동안 생각이 났다. 고드름이 길게 뻗었던 한겨울에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자두가 먹고 싶다.”

철없는 소리를 한다며 웃었지만 천하의 우리 엄마라 하더라도 그 말에 담긴 내 속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승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다녀오는 길에 부산역 광장에서 우연히 주미를 만났다고 했다.

“주미? 아, 그 주미. 생각난다.”

“주미가 진우 니 안부 물어보더라. 잠시 부산에 와 있다 하니까 억수로 반가워하더라.”

“그래, 주미는 잘 산다고 하더나?”

“억수로 예뻐졌더라. 이름도 고쳤단다. 주희, 오주미가 아니고 지금은 오주희란다.”


전화를 끊고 커피를 이어 마셨다. 주미가 건넨 자두가 생각났다. 그날 나는 학교 계단에 앉아 그 많은 자두를 혼자서 다 먹었다. 어떤 것은 엄청 달고 어떤 것은 엄청 시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저 달콤했던 것만 기억난다.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웃음이 나왔다.


“주희, 이제는 오주희라고? 가시나, 웃긴데이.”




Image by Roger Gustavss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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