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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Sep 11. 2021

피자의 추억

시큼하고 고약한, 그래도 그리운


일찌감치 숙제를 해 두고 엄마에게 칭찬을 들을 요량이었다.


공책과 필통을 꺼낸 다음, 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마루라고 해 봤자 엉덩이만 겨우 걸칠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그 마루에 앉아 간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열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바로 보이는 것이 당시 우리 집의 구조였다. 얇은 유리문 한 장이 경계의 전부였으니 바깥의 소리 또한 고스란히 안으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놀이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의 유혹을 무시한 채 오롯이 숙제에만 집중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 아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받아쓰기 공책은 어느새 내가 따먹을 네모난 땅으로 변했고, 모나미 연필은 진작에 휘둘러야 할 야구 방망이로 바뀌던 참이었다. 아까부터 웅성거리던 아이들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현광이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헬로, 헬로."

저 녀석이 실성을 했나? 뜬금없이 헬로라니.


환하게 웃는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낱말 쓰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 문이 활짝 열렸다. 쳐다보지 않고 계속 엎드린 채로 말했다.

우리 엄마는 지금 집에 없는데요.”

시청료는 나중에 받으러 오세요라고 덧붙일 작정이었다. 문을 열었을 누군가가 큰소리로 내게 말했다.

“진우야, 형 왔다. 하하하.”

형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밤송이처럼 짧아졌고 군복을 입어 낯설게 변하긴 했어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내 사촌 형, 문호 형이었다.

“어, 형!”

“그래, 형이다. 형, 휴가 나왔다.”


사촌 간의 우애가 남달랐지만 특히나 문호 형은 내게 있어 친형 그 이상이었다. 부산시 태권도 대표였던 형은, 매일 훈련을 마치고 나면 우리 집에 먼저 들러 라면을 끓여먹은 다음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가 많았다.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라면을 마음껏 얻어먹게 된 나는, 어쩌다 형이 오지 않는 날 공연히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던 형이 군대에 간다며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첫 휴가란다.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진 이유 역시 곧 알 수 있었다. 형의 뒤에 군인 아저씨가 둘이나 더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덜 익은 복숭아처럼 새하얀 얼굴이고, 또 한 사람은 한밤중처럼 새까만 얼굴이었다. 그래서 현광이가 헬로 헬로 했던 거구나. 두 사람 모두 키가 엄청 컸다. 형이 내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동네 조무래기들은 군인 아저씨들의 옆에 달라붙어 서서,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된 외국인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이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하자, 까만 아저씨가 성큼성큼 문턱을 넘어섰다. 내게 뭐라고 그랬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저씨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것일 게다. 손등은 새까만데, 손바닥은 새하얗다. 용기를 내어 손을 잡으려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마터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와아 하며 함성을 질렀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기분은 엄청 좋았다. 잠시 후 나는 무사히 지표면에 착륙했다.

“삼촌이랑 숙모는?”

“응, 일하러 가셨는데.”

아쉽다는 표정으로 형이 아저씨들에게 또 뭐라고 말을 했다. 형은 영어를 엄청 잘하는 것 같았다.

“형이 휴가 나와서 인사하러 왔었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려라. 며칠 뒤에 다시 올게.”

이번엔 하얀 아저씨가 내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형은 두 사람과 함께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몇몇은 형과 아저씨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고 또 몇몇은 그대로 남아서 여전히 부러운 시선을 내게 보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냐고 현광이가 내게 물었다. 나는 한껏 폼을 잡으며 큰 소리로 말해 주었다.


“우리 형인데 태권도 국가 대표 선수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우리 형이 데리고 온 미국 쫄병들이다.”


형이 다녀갔다는 말에 아버지는 반가워하면서도 정작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엄마 역시, 외국 손님까지 동행했는데 식사 대접도 못하고 그냥 돌려보낸 것 같다며 한참 동안이나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무엇보다도 우리 가족을 아쉽게 만든 것은, 형이 두고 간 선물이었다. 받을 때부터 나의 호기심을 꽤나 자극했던 그것은 저녁이 되어 아버지가 상자를 열자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부산일보보다 큰 종이 상자 안에 아버지 밥상만큼 크고 둥그런 떡? 빵? 부침개? 하여튼 그런 것이 떠억하니 누워 있었다. 쇠고기, 양파, 소시지, 고추 같은 것들이 잔뜩 뿌려진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시 미군들이 먹는 음식일 거라고 아버지가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그것이 뿜어는 냄새였다. 우리 가족이 이전까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시큼하고 고약한 냄새가 그것으로부터 쉼 없이 풍겨져 나왔다. 퇴근했을 때, 집 안에서 무언가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는 그것이 바로 범인이라며 두 번째 결론을 내렸다. 엄마도 코를 틀어막은 채 그랬다.

“자기들 딴에는 선물인데, 미국에서부터 갖고 오다 보니 그만 상했는갑네요.”   

아버지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갑소. 참 아쉽네. 멀쩡할 때 먹으면 꽤나 맛있을 것 같은데.”


아쉽기는 내가 제일이었다. 이걸 먹어야 내일 아침 아이들에게 자랑을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자랑이 중요하다 해도 썩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엄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봉지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약한 피자는 고사하고 시큼한 냄새가 풀풀 나는 치즈라는  역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1981년 봄, 내가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문호 형은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휴가를 나왔고 그때마다 잊지 않고 집에 다녀갔다. 복숭아 아저씨와 한밤중 아저씨는 따라 오지 않았다. 형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미국 음식 가져오는 것을 늘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버릴 때 버리더라도 형이 기분 상할 수 있으니 절대로 싫은 내색 하지 말라며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궁금했다. 형은 왜 자꾸만 썩은 음식을 가져오는 걸까? 그냥 라면이나 많이 사 오지. 그 말을 들은 현광이가 미국 군인은 라면 안 먹는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피자를 먹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어린 시절 형이 들고 온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작은 크기였지만, 시큼하고 고약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여동생의 대학 입학 기념으로 난생처음 피자 레스토랑을 가게 된 아버지와 엄마는 주문한 피자가 테이블에 나왔을 때, 약속이나 한 듯 미묘한 표정을 보였다. 맛을 보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거리는 반응으로 보아, 미군들이 가져왔던 그날의 피자는 썩은 것이 확실했다는 두 분만의 공감共感이 테이블 이쪽까지 충분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문호 형은 칠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보다 많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몸의 반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부산에 왔으니 형을 만나야겠다 싶어 중앙동 나라 요양병원에 들렀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제약 때문에 직계 보호자 외에는 병실 내 병문안이 어렵다고 했다. 거동이 자유롭다면 면회실이나 야외에서 볼 수 있었을 거라며 간호사가 오히려 더 아쉬워했다. 대신 전해주십사 미리 준비해 간 피자를 올려놓았다. 형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설명과 함께 두어 번 떼를 써 보았지만, 외부 음식 반입 금지 또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고 한다. 무작정 내 고집만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대로 돌아서야 했다. 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병원 입구에서 전화를 걸었다. 어눌한 발음의 형이 애써 웃는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 피자를 형도 생생하게 기억한단다. 복숭아 아저씨와 한밤중 아저씨까지 소환해 가며 서너 번도 넘게 그날의 피자를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떠드는 내내 형은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전화를 끊을 때쯤엔 시큼하고 고약했던 그 냄새마저 그리워졌다.


지하철이 출발하고 나서야 뒤늦게 빈손임을 알아차렸다. 화단에 내려둔 채 형과 통화를 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와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다시 찾으러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피자 한판을 형과 함께 넉넉히 먹은 기분이 들었고, 그것은 역시 충분히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Image by Bruno Marques Design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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