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플레이 보올
“선생님, 프로가 뭡니꺼?”
지금이 국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스님처럼 평소엔 그저 조용하기만 한 명수가 올해 처음으로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이유로 야단을 듣거나 벌을 서는 것쯤 명수는 이미 각오한 것 같았다. 그 속내를 나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뜬금없는 저 질문을 하는 것은 분명, 조금 전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 때문일 것이다.
81년 가을이 되면서 난생처음 듣는 단어 하나가 우리들 앞에 툭 떨어졌다.
프로 Pro
현수의 새 운동화 스펙스에도 ‘프로’라는 글자가 붙었고, 새로 장만한 찬규의 가방에도 ‘프로 월드컵’이라는 상표가 떡하니 보였다. 병철이의 ‘프로 나이키’는 금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담벼락에 붙은 조용필부터 텔레비전에 나오는 혜은이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우리는 프로예요’, ‘프로는 다르잖아요’를 외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프로’라는 낱말 때문에 열한 살짜리 조무래기들 사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꽤나 심각한 토론이 벌어지곤 했다. 과연 프로란 무엇일까? 프로 축구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축구공 두 개를 동시에 차는 것일까? 내년엔 프로 야구라는 것도 생긴다는데 그것은 또 무엇일까? 설마 야구 방망이 두 개를 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히 보아왔던 프로 레슬링처럼 축구나 야구도 이제 빤스만 입고 한다는 뜻일까?
중학교 다니는 명희 누나와 고등학생 창수 형의 설명까지 총동원된 말싸움의 핵심은, 엄연히 국어사전에 그 정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프로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 동안에 자기 차례를 지켜가며 차분히 의사진행 발언을 하던 찬규와 현수가 난데없이 멱살을 잡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명수는 프로 스펙스와 프로 월드컵이 다투는 꼴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스스로 사태를 평정하겠다는 정의감에 불타오른 명수는, 그래서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하필이면 산수 시간에 말이다.
담임 김명숙 선생님은 다행히 별다른 꾸지람 없이 명수의 질문에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프로라는 건, 돈을 많이 받으면서 직업적으로 한다는 뜻이야.”
“직업적이란 말은 뭔데예?”
“아버지들이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아오는 것처럼, 운동선수들도 축구와 야구를 하면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거지. 다시 말해서 야구와 축구가 그 사람들의 직업이 된다는 의미란다.”
알듯 말듯 미묘한 표정의 명수가 곧 질문을 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예. 도대체 프로가 뭔데예?”
그날 명수가 벌 청소를 마칠 때까지 나는 운동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교문을 나설 때, 여전히 심통이 난 명수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프로가 뭔지 선생님도 잘 모르시는갑다.”
이듬해인 82년 봄이 되자 ‘프로’란 녀석은 더욱 또렷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오월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해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파란 옷들이 학교 운동장과 집 앞 골목을 가득 채웠다.
하늘색 반팔 티셔츠의 가슴팍에 빨간 글씨로 영어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엘, 오, 티, 티, 이. 이것도 명희 누나의 도움으로 겨우 읽어낸 것이다. 우리말로 롯데라고 했다. 롯데가 왜 우리말이냐며 찬규와 현수는 또 싸웠다. 하지만 그 다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현수에게서 찬규를 뜯어내던 명수가 물었다.
“이거 어디에서 샀노? 너거 둘이 연산 시장에 같이 갔나?”
그 말에 현수는 코웃음부터 쳤다.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찬규가 그랬다.
“임마, 우리는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 됐다 아이가. 회원 되면 이런 거 공짜로 준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야구 모자, 배낭, 뱃지, 책받침도 준다. 헬멧을 받은 애들도 있다.”
“헬멧이 뭐고?”
“이 바보야. 야구 선수들이 쓰는 딱딱한 모자 말이다. 니는 헬멧도 모르나?”
명수와 찬규의 말다툼을 듣고 있던 나는 한참 만에 물었다.
“어린이 회원, 그거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노?”
내 질문에 찬규와 현수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말했다.
“구덕 야구장 가서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면 되지.”
“구덕 야구장?”
되묻는 내게 현수는 곧 결정적인 방점을 찍었다.
“응, 그리고 오천 원 내면 된다.”
“오천 원? 오 천원은 뭐 할라꼬?”
“그게 어린이 회원 가입비 아이가, 이 바보야!”
명수도 나도 눈이 똥그래졌다. 오천 원이란다, 무려 오천 원.
그것은 일 년 치 육성회비다.
명수의 성화에 못 이겨 토요일 오후에 구덕 야구장으로 갔다. 집 앞 큰길에서 5번 버스를 탔다. 얼추 한 시간이 넘는 꽤나 먼 거리였다.
찬규 말대로 야구장 벽에는 커다란 펼침막이 제대로 펄럭이고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 대모집’
그 아래로 꽤 많은 아이들이 줄지어 섰다. 어른들의 손을 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일 것이다.
명수가 우리도 일단 줄을 서자고 했다. 나는 명수의 손에 이끌려 그중 짧아 보이는 줄의 맨 뒤꽁무니에 붙었다. 잠시 기다린 뒤에 우리 차례가 되었다.
은행에서 본 것처럼 예쁜 옷을 차려입은 누나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어서 와. 지금은 별님 회원 가입만 가능하단다.”
“별님 회원이 뭔데예?”
“응, 선착순 만 명까지는 해님 회원이고, 그다음부터는 별님 회원이지.”
“네? 만 명이라꼬예? 어린이 회원이 벌써 만 명이 넘었단 말입니꺼?”
“응, 그런데 누나가 지금 좀 바쁜데 너희들, 가입비 오 천원은 가지고 왔지?”
“때리기는 왜 때리노?”
명수는 계속 투덜거렸다. 은행 옷 누나가 살짝 쥐어박은 것을 명수는 자꾸만 ‘때렸다’고 했다. 명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일요일에 만두를 사 먹지만 않았더라도 돌아오는 차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입이 툭 튀어나온 명수를 달래 가며 꼬박 두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대문 앞에 엄마가 나와 있었다.
“명수야, 너거 엄마가 아까부터 니 찾으시더라. 시장에서 장사 하신다꼬 너거 엄마도 고생 참 많으시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 알겠제?”
명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선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전에 없이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
오천 원을 달라고 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찼다. 그 바람에 밥알을 흘렸다. 엄마의 지청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물을 마실 때였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 되고 싶은데예.”
“어린이 회원? 그게 뭔데?”
옳다구나 싶어진 나는 현수와 찬규로부터 시작, 국어사전을 지나 하늘색 티셔츠를 흘깃 보며 구덕 야구장에 이르기까지 나름 장황한 설명을 물 흐르듯 이었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아버지는 이야기의 말미에 내게 물었다.
“그래, 그거 하려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노?”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입 안에 맴도는 액수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깎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 오천 원이라 하데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의 목소리가 냅다 달라붙었다.
“머라꼬? 오천 원? 이 녀석이 정신이 있나 없나?”
엄마가 내 등을 때렸다. 찰싹, 소리가 났다. 순간, 명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명수의 질문처럼 뜬금없는 눈물이 툭 하고 흘렀다. 손에 든 숟가락이, 이미 식어버린 된장국이, 그리고 발치에 닿은 노란 밥상이 흐릿해졌다.
[2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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