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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11. 2021

번개 야구단의 추억 (2)

그래도 경기는 시작된다


https://brunch.co.kr/@jay147/180


다음날 아침, 여동생을 데리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엊저녁 오천 원 사건 때문에 엄마는 아버지와 말다툼까지 했다. 그런 채로 집에 있자니 엄마의 눈치가 보여서, 앉은자리는 영 바늘방석이었다. 동생과 밖에서 놀다 오겠다며 일부러 큰소리로 말해도 엄마는 아무런 대답을 않았다. 공연히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는 동네 놀이터엔 언제 왔는지 명수 혼자서 무심히 그네를 흔들고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명수 역시 어젯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여동생을 안아 올려 그네에 앉히고는 서너 번 밀어주었다. 아직 어린 동생은 오빠의 쓰린 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엔 저만치서 병철이와 현광이도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 순간의 우리 넷 머리 위에 말 풍선을 그린다면 아마도 모두에게 똑같은 대사를 써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오천 원을 구할 수 있을까?’


현광이는 놀이터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뒤통수를 턱턱 부딪혔고, 병철이는 흙을 걷어내지도 않 돌계단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그때 우리들 옆으로 하늘색 롯데 티셔츠를 입은 애들 서넛이 또 지나갔다. 그중 하나는 헬멧까지 썼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던 중에 야구장이니 구덕이니 하는 말을 했다. 아마도 오후에 있을 롯데와 해태의 야구 경기를 서둘러 보러 가는 눈치였다.

삐죽이 고개를 내민 돌부리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명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우리도 만들자.”

“뭐를?”

긴 하품 끝에 잔 돌멩이를 던지며 현광이가 물었다.

“야구단!”

“뭐어? 야구단?”

병철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네를 더 밀어 달라는 동생의 성화도 잠시 잊은 채, 나 역시 명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응, 우리가 롯데 자이언츠 같은 야구단을 만드는 거다.”

“우리가 야구단을 만든다고?”




명수의 계획은 이러했다.


부모님으로부터 오천 원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일단 우리가 야구단을 먼저 만든다. 나, 명수, 병철, 현광이 주축이 되어 우선 야구를 시작하면 이것이 곧 소문이 날 테고, 학교와 동네의 아이들이 그걸 보면 재미있다며 끼워 달라고 조를 것이 분명하다. 야구는 아홉 명이 하는 것이니까 열명째부터는 가입비를 받는다. 우리 반 학생 수만 해도 육십 명이 넘고 오 학년 전체는 무려 팔백 명이 넘는다. 육 학년 형들은 대장 노릇을 할 거니까 절대 안 되고, 사 학년은 당연히 끼워준다. 아직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가입비로 천 원씩을 받는다. 그러면 스무 명에게서만 받아도 이만 원이다. 그 돈으로 우리 넷이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되는 것이다. 쿠쿵!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날의 우리는 무엇에 홀렸던 것인지 다들 명수의 의견을 옳다구나 하며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되고 싶다는, 지극하고도 간절한 열망이 그때의 우리 모두를 잠시 눈멀게 했던 것 같다.


다들 앞다투어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네를 더 밀어 달라는 동생을 겨우 달래서 등에 업고 명수네 집으로 갔다.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명수 어머니는 일요일에도 집을 비웠다.

방안에 들어서니 시큼한 생선 비린내가 가득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야구단을 창설하고야 말겠다는 네 녀석의 굳은 의지가 생선 냄새를 창 밖으로 밀어냈다.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는 아이디어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일단 야구단의 이름이 필요하다. 롯데나 해태 같은, 그런 것 말이다.”

의장 강명수 어린이가 먼저 말했다. 롯데는 회사 이름인데, 자이언츠는 그럼 뭐냐는 장현광 총무의 의사진행 발언이 있었다. 잘 모르는 것은 그냥 넘어가자는 계병철 간사의 중재 덕분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은 곧 의미 없는 것으로 손쉽게 정리되었다. 한 시간이 넘는 설왕설래 끝에 야구단의 이름도 마침내 정해졌다.


번개 야구단


그것이 정확하게 누구의 의견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듯하고 멋진 이름이라며 다들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무적이니 승리니 하는 이름 따위들은 애당초 경합 초반에 밀려났다.

곧 명수는 신문지를 들고 왔다. 신문지 위에 밥그릇을 엎고 둘레를 따라 선을 그린 다음, 가위로 조심스럽게 오려냈다. 그러고는 크레파스를 챙겼다. 코를 훌쩍이며 엎드렸던 명수가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내밀어 보였다.

동그란 종이 위에 우르르 쾅쾅 번개가 치는 모습이 그려졌고 빨강과 파랑이 환상적인 비율로 칠해졌다. 그리고 빨강 위에 한 글자, 파랑 위에 한 글자, 번, 개라고 쓰였다. 번개라는 이름만큼이나 의미 있는 구단의 심벌이자 로고, 상징이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다.

창립 발기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잔뜩 고무된 명수는 그 자리에서 쓱싹쓱싹 세 개를 더 만들어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모두 이걸 가슴에 붙여라. 우리가 번개 야구단인 것을 같은 반 아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야구단의 이름도 만들었고, 심벌도 생겼는데 이제는 뭘 하지? 누군가가 물었다. 명수는 이미 계획이 다 있었다.

“다음은, 체력 훈련이다.”


명수의 말에 따라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갔다. 우선 동네를 몇 바퀴 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동생을 업고 달릴 수가 없어서 반장 집 구멍가게 앞 평상에 동생을 앉혔다. 반장 아주머니가 동생에게 사탕 한 개를 쥐어 주었다. 명수가 제일 앞에 섰고 내가 맨 마지막이었다. 명수의 구령에 맞추어 동네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세 바퀴를 마치고 네 바퀴째 때는 두 명의 신입 회원이 생겼다. 옆 반 종훈이와 신래였다.

명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계산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동네를 뛰고 또 뛰었다.

전에 없이 저녁밥을 맛있게 먹는다고 아버지가 나를 칭찬했다. 칭찬도 기분 좋았지만,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되는 것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학교에 갈 때마다 번개 야구단 심벌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명수가 먼저 나서서 꽤나 긴 설명을 아주 능숙하게 잘도 했다. 국어 책은 더듬더듬 읽으면서도 번개 야구단 가입 조건을 설명할 때는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눈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창단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번개 야구단은 드디어 열 번째 회원을 받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주부터는 실전 연습이다.”

화요일 아침 조례가 끝났을 때 명수는 우리에게 다음 계획을 하달했다. 야구 연습에 사용할 수 있는 용품을 각자 챙겨서 이번 주 토요일 오후 두 시에 놀이터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야구 용품이라? 머릿속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우리 집에 과연 야구 용품이랄 게 무엇이 있을까? 야구 배트는 없고, 당연히 글러브도 없다. 가만있자, 그렇지. 테니스 공 하나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대망의 실전 연습을 앞두고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금요일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드디어 토요일 오후 세 시가 되었다. 장호는 엄마랑 외갓집에 가야 한다며 훈련에 불참했고, 가입비 천 원을 마련하지 못한 열 번째 회원 승일이는 눈물을 머금고 탈퇴했다. 결국 여덟 명이 남았다. 물론 각자의 가슴에는 번개 야구단의 심벌이 당연히 펄럭였다.

명수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가져온 야구 용품의 모습 때문이었다. 배트가 한 개, 글러브가 한 개, 정식 배트는 아니지만 공을 칠 수는 있을 것 같은 방망이가 한 개, 야구공의 모양을 한 고무공이 한 개, 그리고 내가 가져간 테니스 공이 한 개,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야, 명수야. 이것 가지고 우째 훈련을 하노? 선수는 여덟 명인데, 글러브는 한 개 밖에 없다.”

“괜찮다.”

명수가 굳었던 얼굴을 풀고 또다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회원이 늘어나고 가입비를 받으면….”


명수는 여덟 명을 두 편으로 갈랐다. 공격팀은 상관없었지만 수비팀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한 명은 투수, 한 명은 포수, 남은 둘 중에 하나는 1루를, 나머지 하나는 저만치 외야 쯔음 되어 보이는 곳에 가서 우두커니 섰다. 한 개 있는 글러브는 당연히 투수가 껴야 했고 포수를 비롯한 나머지 야수들은 그냥 맨손이었다. 하지만 그 열악한 훈련 환경을 비난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오늘도 따라나온 여동생이 돌계단에 앉아 손뼉을 쳤다. 오월의 푸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명수가 곧 큰 소리로 외쳤다.

“플레이 보올~!”

가슴이 뭉클했다. 번개 야구단의 역사적인 첫 연습이 시작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말이다.



[3부에 계속됩니다]




Image by Ki-Chan, Kim from "Inside the alley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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