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동기同期를 우선 배려하고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명수의 계획은 편 짜기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병철이와 현광이와 내가 당연히 명수와 같은 편이 되고, 뒤늦게 합류한 준효, 종훈이, 그리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우리 반 친구 둘, 그렇게 네 명은 또 다른 편이 되었다. 야구는 단체 운동이라는 말과 함께 명수는 자기 팀, 아니 우리 팀이 먼저 공격을 하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허점이 수두룩했지만 당시의 그 누구도 명수의 지시에 감히 반기를 들지 않았다.
준효 팀의 투수는 종훈이었고, 명수 팀의 1번 타자는 가위바위보를 통해서 나로 결정되었다. 경기 초반이라 몸이 덜 풀려서인지 투수 종훈이의 컨트롤이 미처 잡히지 않았다. 나는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뒤이은 현광이와 병철이도 역시 볼넷이었다. 순식간에 만루가 된 것이다.
네 번째 타자라기보다 4번 타자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명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고, 제대로 된 한 방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명감독 겸 명선수임을 연산동 만방에 알리고 싶었을 게다. 배트를 휘두르는 폼 만으로는 공포의 사번 타자 백인천 선수를 일본에 도로 보내버릴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명수는 호쾌한 헛스윙 세 번으로 삼진을 먹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팀을 이루는 선수는 고작 네 명인데 세 명은 이미 누상에 나가 있으니 다음 타석에 들어설 선수가 없는 것이다. 강명수 감독은 어깨와 코를 제멋대로 문지르며 사인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우리 중에서 그것을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명수는 손을 모아 나팔을 만들어 큰 소리로 말했다.
“전부 한 칸씩 이동!”
결국 3루에 있던 내가 홈으로 들어와 다시 타석에 서고, 병철이와 현광이는 한 칸씩 다음으로 옮겼으며 비어있던 1루는 명수가 채웠다. 삼진을 먹고도 출루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효 팀에서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네 타자를 상대한 종훈이는 이미 팔에 힘이 빠진 듯했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전력을 다해 던졌겠으나 내게 보이는 공은 아리랑 춤을 추며 너울너울 날아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배트를 냅다 휘둘렀다. 무언가 배트에 닿는 느낌이 전해졌다. 제대로 맞았다. 따악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고무공인 관계로 토옹 소리가 났다. 푸른 하늘을 가르며 높이 떠오른 공은 아뿔싸 놀이터 담장 옆 이층 집 너머 어딘가로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만루 홈런의 기쁨보다 공을 잃어버렸다는 명수의 실망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홈런을 쳐버리면 우짜노?”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남은 공이라곤 이제 내가 가져온 테니스 공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지금은 여동생이 가지고 노는 중이다. 동생을 겨우 달래서 테니스 공을 받아온 명수가 또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부터 홈런 치면 아웃이다, 알겠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다들 알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컨트롤의 마법사 종훈이에서 황금의 팔 준효로 투수가 바뀌었지만 아직 1회 초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을 때 점수는 이미 오대 영이 되어 있었고, 또다시 안타를 치고 1루로 나갈 즈음에 준효 팀 외야수 한 명은 자기 엄마가 부른다며 경기 도중 집으로 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우리 팀 병철이가 준효 팀의 외야수를 맡아주어야 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준효가 명수에게 물었다.
“명수야, 이거 언제까지 해야 되는데?”
그 말에 명수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이미 배산 너머로 사라지고 오월의 저녁달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그만 하까?”
그제야 다들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먼지가 풀풀 일었다. 놀이터 구석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고 있던 여동생을 둘러업었다. 팔이 뻐근했다. 번개 야구단의 역사적 첫 연습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저녁밥 때가 다 되었는데 어디서 놀다가 이제 오냐고 엄마가 동생을 받아 안으며 가볍게 나무랐다. 나는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그다음 주 토요일, 약속 시간에 놀이터로 모인 것은 명수, 병철이, 나 셋뿐이었다.
웃는 얼굴을 본 지가 한참 된 것 같은 명수는 또다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야구단의 선수를 늘려 장차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되려던 명수의 꿈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오늘은 연습을 하나 어쩌나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현광이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 앞에 닿기도 전에 현광이가 소리부터 쳤다.
“얘들아, 됐다. 됐어. 우리 전부 롯데 자이언츠 회원이 될 수 있다.”
모두의 눈이 테니스 공만큼 커졌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대머리 군인 아저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배달되던 국제 신문이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저녁나절에 오는 부산일보를 받아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른들은 그것을 ‘석간’이라고 했다. 갑자기 늘어난 구독자 때문에 각 동네마다 부산일보 배급소에서는 신문 배달 직원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우연히 집에 들른 사촌 형이 현광이에게 그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옳다, 이거다.
“그래, 신문 배달하면 얼마를 준다 하더노?”
당연히 명수의 첫 질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현광이가 겨우 대답을 했다.
“한 달에 이천오백 원, 이천오백 원 준단다. 개척하면 뽀나스도 따로 준다고 하더라.”
“뽀나스? 개척이 뭔데?”
“신문 안 받아보던 집에 새로 넣는 걸 개척이라 하는데, 개척 뽀나스는 오백 원이라 하더라.”
한 달에 이천 오백 원, 게다가 개척 보너스까지? 두 달만 채우면 오천 원. 그러면 꿈에도 그리던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될 수 있다. 보너스로는 짜장면과 만두도 사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빛에서 느껴지는 공감共感을 읽었다. 명수가 갑자기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위에 병철이가 손을 탁 덮고, 나도, 현광이도 얼른 손을 포갰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자!”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되기 위해 창단한 번개 야구단, 느닷없이 들이닥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부산 일보 신문 배달, 아아, 역사는 우리를 승자로 기억하리라. 두둥.
현광이 사촌 형을 따라 일행은 망미동에 있는 부산일보 배급소로 갔다. 우리가 사는 연산동이 아닌, 옆 동네 망미동까지 굳이 간 것은 우리가 신문 배달하는 것을 혹시나 부모님들이 알게 될까 봐 하는 염려에서였다.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볼록 나온 배급 소장은 우리를 격하게 반겼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바쁜 시기에 한 명도 아닌 넷이나 데려오다니. 소장은 현광이 사촌 형을 얼싸안으며 마른입으로 침을 튀겼다. 그 모습을 보는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첫날은 기존에 배달을 하던 중학생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앞으로 신문을 넣을 집들을 익혔다. 하루에 대략 150~200 집에 신문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힘들어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나름 할만할 거라면서 나를 데리고 나간 종구 형이 그랬다. 형은 배달을 마칠 무렵, 내게 딸기 우유를 사 주었다. 형은 아픈 엄마의 약값을 벌기 위해 신문 배달을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 공연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형은 엄마를 위해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 우리는, 나는 고작… 그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끄러움을 겨우 덮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명수네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망미동 배급소로 달려갔다. 처음 며칠은 역시나 힘들었다. 자전거가 없으니 한 번에 오십 부 정도를 먼저 돌리고 나서 다시 배급소로 재빨리 돌아와 나머지 신문을 챙겨야 했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새까만 신문 잉크가 묻은 서로의 얼굴을 놀려가며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지없이 즐겁기만 했다. 명수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어린이 회원, 하지만 지금은 신문 배달부.”
공깃밥 두 그릇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모습은 전에 없던 일이라며 엄마는 신기하다는 말까지 했다. 수업 후에 매일 아이들과 야구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둘러댔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신문 기름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냐며 엄마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공책을 들고 바깥바람이 들어오는 마루로 나가야 했다. 그런 사정은 병철이, 현광이, 명수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유월이 되었고 다들 꿈에도 기다리던 첫 월급날이 다가왔다.
“배불뚝이 영감쟁이, 구두쇠 대머리.”
역시나 제일 화가 난 것은 명수였다. 애써 달래기는 했지만 기분이 편하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잠까지 설쳐가며 기다렸던 첫 월급날인데, 먹이를 기다리는 참새처럼 배급소 입구에 나란히 선 우리에게 배급 소장은, 월급은 두 번째 달부터 지급된다고 했다. 첫 월급을 받고 나면 당장 그만둬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되는 날에 첫 달치 월급을 줄 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시 말해 한 달치의 월급은 자동으로 지급 유보된다는 뜻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구 형은 우리가 초등학생이라 그런 것 같다며 요구르트 한 병씩으로 우리를 달랬다.
“우리, 개척은 하지 말자.”
종구 형이 간 것을 확인한 강명수 감독의 작전 지시였다. 개척한 보너스마저도 나중엔 이런저런 핑계로 안 줄 지 모른다는 염려였다. 모두는 이견 없이 명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처음보다 익숙해져서인지 두 번째 달엔 확실히 일이 수월했다. 감독의 금지 명령이 있었지만 역시 늘어나는 구독자 때문에 작전과 달리 개척도 두 집이나 했다. 내가 받을 보너스가 천원이 된 것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조차 우리들 몸에서 신문 냄새가 난다고 할 즈음, 또다시 월급날이 돌아왔다. 만약 이번에도 월급을 주지 않으면 연산동 파출소 순경 아저씨한테 신고할 거라며 명수는 남다른 결기를 미리 보였다. 하지만 명수가 염려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급 소장은 이천오백 원씩 담긴 누런 봉투를 우리에게 나눠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개척 보너스는 다음 달까지 묶인다고 했다. 상관없었다. 다음 달로 밀렸을 뿐, 배급 소장이 그것을 아예 떼어먹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푼도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명수가 다시 모두에게 다짐을 받았다.
“맞다. 십원이라도 모자라면 어린이 회원 가입 못한다.”
“개척 뽀나스는 영영 안 줄지도 모르니까, 그거는 믿지 마라.”
저마다의 굳은 다짐을 토하면서 망미동 고개를 넘었다. 저만치 산 아래로 우리 학교가 보였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흐뭇하게 두드려가며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롯데 어린이 회원, 지금은 신문 배달을 한다네.”
그때였다.
“어이, 거기 얼라(어린이)들.”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한눈에 봐도 꽤나 덩치가 큰 형들이었다. 내 옷깃을 슬며시 잡아당기며 현광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다. 저거 배산 양아치들이다.”
이웃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유 없이 약한 아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몸을 뒤져 돈을 깡그리 빼앗아 간다는 배산 양아치. 어른들도 전혀 겁내지 않는다는 그 배산 양아치들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