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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13. 2021

번개 야구단의 추억 (마지막 회)

그럼에도 플레이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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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덜미를 잡힌 명수가 골목 안으로 끌려가는 순간, 어쩌면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홀로 남게 될 명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로 내달리고 있는 병철이와 현광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나마 둘은 살았으니 다행이다 싶었고, 기왕에 멱살이 틀어 잡힌 나는 명수 곁에 있어야겠다는 여유로운 생각까지 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칠월, 초여름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반바지였다.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를 배산 양아치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녀석들 중 제일 독하게 생긴 하나가 내 멱살을 움켜쥔 채, 바지 주머니에 우악스럽게 손을 넣었다. 신문 배급소에서 받은 누런 봉투가 그대로 딸려 나왔다.

“오호, 이 자식들 봐라?”

봉투 안을 슬쩍 들여다본 양아치가 다른 주머니를 차례로 뒤졌다. 십 원에 한 대라는 말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한 대를 위한 십 원이 그 안에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내 뺨을 때렸다. 불이 번쩍 했다. 그대로 가만히 있었더라면 더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을 가져갔으면 됐지, 왜 때리냐는 항변에 결국 양아치는 발길질을 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두어 번 더 걷어 차였다. 아프다기보다 분했다.

다음은 명수 차례였다. 주머니로 들어오는 손을 막으려고 명수는 처음부터 필사의 몸부림을 쳤다. 그럴 때마다 철썩철썩 퍽퍽, 명수의 뺨과 몸에서 연신 소리가 났다. 잠시의 밀고 당김 끝에 결국 명수의 월급봉투도 양아치의 손에 쥐어졌다.

명수는 끝까지 녀석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채로 악을 썼다. 그 돈은, 그 돈만은 안 된다고. 어린이 회원 가입비라고.

재개발을 앞두고 반쯤 부서져 나간 집들 사이로 명수의 힘없는 호소가 울렸다. 하지만 명수의 애원을 들어줄 양아치들이 아니었다. 나와 명수는 번갈아 가며 두어 번 더 밟히고 채였다. 오늘 일을 어른들에게 말하면 집까지 쫓아와 죽여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과 함께였다. 잠시 후 양아치들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우리 둘만 남았다. 더운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다.




명수의 얼굴에는 코피 자국이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일단 명수를 씻겨야 했다. 놀이터 수도가 떠올랐다. 털레털레 내딛는 걸음에는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명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명수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겨우 부축을 했다. 배산 고개를 넘어 놀이터가 바라다 보이는 아랫길에 도착할 때까지 명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명수야.”

“진우야.”

놀이터에 다다랐을 때 건너편 담장 밑에서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역시나 현광이와 병철이었다. 걱정 가득한 둘의 얼굴은 사지死地에서 생환生還한 우리보다 더한 고생을 겪은 듯했다. 여태껏 잠잠하던 명수는 병철이와 현광이를 보자 갑자기 소리를 내서 울기 시작했다.

“꺽꺽, 어린이 회원, 꺽꺽, 나쁜 놈들, 그 돈, 꺽꺽…”

현광이는 손으로 물을 받아와 명수의 얼굴을 서둘러 씻겼고, 병철이는 입고 있던 셔츠 자락을 걷어 올려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명수의 등을 털었다. 한참 만에 명수가 울음을 그쳤다.


“이제 개안나?”

돌계단에 나란히 앉고 나서 현광이가 조용히 물었다. 명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그러자 현광이가 허리를 돌려 무언가를 찾는 것 같더니 그것을 명수에게 내밀었다. 낯익은 누런 봉투였다.

“이거, 명수 니 해라. 나는 어린이 회원 안 해도 된다.”

“현광이가 안 하면 나도 안 할란다.”

현광이의 말꼬리에 덧붙여 병철이도 제 주머니에서 꺼낸 봉투를 명수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명수를 만나면 그렇게 하자고, 우리가 오기 전에 둘은 아마도 그렇게 의견을 모은 것 같았다. 조용히 봉투를 내려다보던 명수가 또 울먹울먹 하려고 했다. 내버려 두면 또 울 것이다. 나는 얼른 명수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집에 가자, 늦었다. 엄마들이 걱정하겠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명수는 저만치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여동생이 달려와 와락 안겼다. 그 바람에 옷에 묻었던 먼지가 풀럭 일었다. 어디서 무슨 장난을 했길래 옷이 이 모양이냐며 엄마가 야단부터 쳤다. 대답하지 않았다.

서둘러 밥을 먹은 다음, 숙제를 하려고 방바닥에 엎드렸는데 동생이 냉큼 등에 올라탔다. 이랴이랴 말 타는 소리를 하던 동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오빠야한테서 신문지 냄새난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일을 쉬게 된 아버지가, 대문 밖에 내 친구들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산부터 챙겨 들었다.

역시 명수와 함께 병철이와 현광이가 시익 웃고 서 있었다. 어젯밤 일이 짧게 스쳤다. 아, 드디어 명수가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러 가는구나. 그 역사적인 현장에 우리를 동행시키려는 생각이구나. 구덕 야구장까지 가려면 나는 차비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속내를 읽었는지 병철이가 먼저 말했다.

“걸어갈 거다. 차비 필요 없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연산 시장 입구였다. 올려다본 간판에는 중화요리 도원루桃園樓라고 쓰여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문 앞에서 미적거리는 내 등을 병철이가 힘껏 떠밀었다.

짜장면 네 개와 군만두 하나를 시킨 다음, 명수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내 말, 잘 들어라. 네 명이 동시에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다 같이 짜장면이나 맛있게 묵자.”


고작 열두 살에 불과한 코흘리개 넷의 그 여름 도원결의는 꽤나 비장했다. 콜라를 채운 컵을 맞부딪혀가며 어른들의 건배 흉내도 냈고, 우정이 어떻느니 의리가 어떻느니 그런 말도 잠깐씩 했던 것 같다.

명수는 배산 양아치들에게 얻어맞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잘도 꾸며내서 병철이와 현광이에게 들려주었다. 십칠 대 일로 싸웠다는 무용담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 같았다. 내 앞으로 군만두 한 개를 더 밀어주며 눈을 찡긋거리는 것에는 암묵적 동의를 부탁하는 명수의 강요가 담겨 있었다.


강명수 감독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신문 배달을 당장 그만 두기로 했다. 한 달치 월급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학교를 다닐 때와는 달리 방학이 되면 매일 같은 시각에 망미동으로 갈 명분도 없고, 행여나 또 배산 양아치들을 만나 월급을 빼앗기면 어쩌나 사실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다음에 어른이 되더라도 절대 나쁜 사람은 되지 말자며 입을 모아 배산 양아치들과 배급소 소장을 싸잡아 욕하기도 했다.


도원루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이미 그쳤다. 문방구에 들렀다. 짜장면을 먹고 남은 돈으로 고무공 몇 개를 샀다. 야구공을 사고 싶었지만 가죽으로 된 진짜 공은 꽤나 비쌌다. 짜장면으로 배를 채웠을 뿐 아니라 그동안 부족했던 야구용품까지 채운 우리의 다음 선택은 당연했다. 놀이터에서 야구를 하는 것이었다.

명수가 투수를, 병철이가 포수를, 내가 타자를, 그리고 현광이가 심판 겸 일루수 겸, 이루수 겸, 삼루수 겸 외야수를 맡기로 했다. 야구공 무늬가 그럴듯한 고무공을 공중에 몇 번 던져보던 명수가 나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젠 홈런 쳐도 아웃 아니다!”




그 해 여름 내내 놀이터에서 야구를 했다. 길고 긴 방학의 무료함에 지친 아이들은 자기들도 함께 야구를 하고 싶다며 하나둘 우리를 찾아왔다.

단장 명수 번개 야구단 가입비로 천 원을 받는 대신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야구단 가입을 원한다면 무조건 야구 용품 하나씩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어떤 아이는 배트를, 또 다른 아이는 글러브를,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인 아이는 헬멧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해 팔월이 끝나갈 무렵 번개 야구단은 마침내 스물한 명이라는 넉넉한 선수를 보유하게 되었고, 그 덕에 명수는 더이상 야구 용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때를 즈음하여 병철이와 현광이와 나는 무려 코치로 승격했다. 그것은 창단 동기에 대한 감독 명수의 배려기보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울보 명수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음 틀림없다.



[에필로그]


배산 양아치들에게 봉변을 당한 날로부터 한 달 즈음 지났을 때, 신문 배달 방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던 종구 형이 뜻밖에도 현광이 사촌 형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종구 형은 노란 봉투 하나를 전해주었다. 그 안에는 미처 받지 못한 월급 만 원과 개척 보너스 천오백 원이 들어있었다.

종구 형은 망미동 파출소 순경 아저씨를 배급소 대머리 소장에게 데려갔다고 했다. 놀랍고, 신기하고, 또 고마웠다. 그날, 종구 형과 함께 다시 한번 중화요리 도원루에 갔다. 물론 우리가 당연히 한 턱을 냈다. 남은 돈을 어머니 약값에 보태겠다고 했지만 종구 형은 코흘리개들의 건방진 제안을 끝까지 사양했다.

형에게서 도움을 받기만 했다는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중학생 형에게 짜장면을 대접할 정도가 되었으니 우리 모두는 이제 다들 어른이 된 것이라며 그후로도 오랫동안 뿌듯해했다.


이 사진 속에 번개 야구단 창단 멤버 네 명이 있습니다




Image by cindydangerjone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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