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붕방방방 붕방방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대문 앞에서는 명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발까지 동동거리는 걸로 봐서는 꽤나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낀 명수가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발그레한 얼굴에 하얀 이가 도드라져 보였다.
“헤헤, 진우야, 지금 오나?”
어릴 때부터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던 우리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실업계와 인문계로 서로의 진로가 달라지게 되었다. 주말이 아니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명수 집에는 아직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간단한 연락조차 용이하지 않을 때도 더러 있었다. 일요일이 낼모레인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초겨울 추위를 무릅써 가며 나를 기다리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명수에게 꽤나 급한 용건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추운데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든가 하지, 왜 밖에 있노? 얼른 들어 가자.”
“아니다. 여기서 말하면 된다. 간단한 거다.”
“무슨 일인데?”
“진우야, 다른 게 아니고, 있잖아, 우리, 내일… 미팅하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미팅?”
제법 심각한 표정이 된 명수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통학 버스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주치게 된 여학생이 있다고 했다. 명수 눈에는 그 여학생이 꽤나 예뻐 보였나 보다. 한동안 눈치를 살피다가 바로 어제 오후, 용기를 내서 그 여학생을 따라가 말을 건 다음, 급기야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다. 퇴짜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당초의 염려와는 달리 그 여학생이 조심스레 답하기를, 둘이서만 만나는 것은 아직 부담스러우니 명수가 한 사람을 더 데리고 오면 자기도 역시 친구를 동반하겠다고 하더란다. 이른바 커플 미팅을 하자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명수의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만만한 러닝 메이트가 하나 있었다.
“진우야, 같이 가자, 응? 남포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일, 토요일이니까 수업 마치고 같이 가자, 응?”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으로 명수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손끝으로 간절함이 절절히 전해졌다.
“당장 내일?”
들러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이야 딱히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미팅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좋다고 하기엔 오히려 내가 더 긴장이 되었다.
“함께 가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런데 명수야, 미팅,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단박에 표정이 밝아진 명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니는 걱정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니는 그냥 옆에서 웃고 있으면 된다.”
“웃고만 있으라고?"
“응. 그리고, 진우야.”
명수가 잠시 뜸을 들이며 머뭇거렸다.
“응, 말해라.”
“내일 미팅 나가면…… 나도 니랑 같은 고등학교 다닌다고 말해주라, 알겠제?”
그 말을 던지자마자 명수는 잰걸음으로 자기 집을 향해 달려갔다. 저만치 멀어지는 명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텅하고 대문이 열렸다. 우리가 열일곱 살이던 1987년의 12월,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초인종을 누른 명수는 아디다스 파카와 핀토스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 브랜드 제품으로 한껏 멋을 부릴 작정이었겠지만 모든 것이 연산 시장에서 구입한 짝퉁들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깍두기에 불과한 나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냥 나름 깨끗해 보이는 옷으로만 골라 입었다.
약속 장소인 남포동 세모 네모 커피숍은 그 이름처럼 실내 장식이 온통 세모와 네모였다. 심지어 물컵도 세모와 네모 모양이었다. 우리는 일부러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더니 둘 또는 넷, 때론 더 많은 머릿수들이 미팅에 한창이었다. 겨울인데도 겨울이 아닌 공간으로 느껴졌다.
“잘하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도 데이트할 수 있겠다.”
옷매무새를 쉴 새 없이 고치는 중에도 데이트니 첫 키스니를 줄곧 읊어대던 명수가 불쑥 입구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요. 미애 씨.”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애 씨’를 쳐다보았다. 오호, 명수의 눈이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뻤다, 명수 말대로. ‘미애 씨’는 댄스 머신 김완선을 꽤나 닮았고, ‘미애 씨’의 옆에 선 여학생은 가창력의 대명사 이선희와 흡사했다. 쉽게 말해, 내 스타일이었다. 절대 긴장하지 말고 무조건 차분해야 된다는 다짐과 달리 내 입꼬리는 저 혼자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친구로 지낸 것이 얼추 십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명수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선생님의 간단한 질문에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고, 또래들의 타박에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부터 흘리던 소심한 명수였다. 그런데 그날은 화술話術의 신神이 명수의 혀 끝에서 작두를 타는 듯했다.
별 시답잖은 명수의 우스개 한마디에 ‘미애 씨’는 자지러졌고, 어설픈 성대모사에 미애 씨의 친구 ‘주희 씨’는 웃다가 사래가 들릴 정도였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경계를 제대로 무너뜨렸는지 초코 파르페와 밀크셰이크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미애 씨’와 ‘주희 씨’는 어느덧 ‘미애’와 ‘주희’가 되어 있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주희도 나에게 적잖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생애 첫 미팅을 앞두고 밤늦게까지 시집詩集을 뒤져가며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필 주희도 문예부원이라고 했다. 피천득 선생의 '인연'을 언급해가며 이야기에 한창인 우리를 보며 명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서, 서로 겹치지 않게 파트너가 잘 정해졌다는 일련의 만족감이 물씬 느껴졌다. 명수는 두 여학생 모두 자기를 선택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했던 것 같았다.
첫 만남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곧 자연스러운 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용두산 공원 근처의 경양식 집.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후까스와 함박 스테이크가 우리 앞에 근사하게 차려졌다. 당시 우리의 궁핍했던 용돈 사정을 감안한다면 비후와 함박이는 절대로 감당이 안될 과소비였지만 일단 그것은 다음 문제였다. 김완선과 이선희를 위해선 그보다 더 한 것도 할 자신이 있었다. 유리에 비친 우리 모습을 보니 제법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팅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쁘지 않은데?
테이블은 넷이 공유하고 있지만 대화는 진작부터 둘로 나눠진 상태였다. 조용필과 전영록이 가수왕 자리를 두고 우열을 다투는 옆에서 이문열과 박완서가 노벨 문학상을 차지하려고 진검 승부를 벌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데이트는 이제 더 이상 명수 혼자만의 희망 사항이 아니었다. 이선희의 손을 꼬옥 잡고 공원 길을 걷는 성탄 전야를 생각하자니 아까부터 내 엉덩이가 들썩였다.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는다 싶을 즈음에, 미애의 손금을 봐주겠다며 능청을 부려대던 명수가 뜻밖에도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영화 관람이 녀석의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냥 여기서 주희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는데 극장에 가고 싶은 마음을 미애도 숨기지 않았고 주희마저 영화 관람이 취미라며 따라 일어서는 바람에, 나로선 명수의 제안을 반대할 명분이 딱히 없었다.
팬들의 열렬한 응원에 잔뜩 고무된 명수는 그 음흉한 마음을 냉큼 콩밭에 심을 작정이었는지 눈앞에 보이는 제일 극장의 간판을 가리키며 대뜸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저거 보자!”
우리는 그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영화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광안리나 해운대 바닷가를 걸었어야 했다. 차라리 용두산 공원을 걸으며 비둘기 모이나 주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미애와 주희에게 우리가 아닌 다른 남자, 그것도 우리보다 잘 생긴 남자의 모습을 보여줘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늘 늦은 법이다.
로봇이 나오거나 공룡이 뛰어다니는 영화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에 불이 켜졌을 때,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성탄 데이트를 계획하던 미애와 주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미애는 톰 크루즈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려는 참이었고, 주희는 톰 크루즈의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각각 ‘톰’과 ‘크루즈’를 아로새긴 미애와 주희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연신 ‘어쩜, 어쩜’, '저게 사람이야, 조각이야' 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끝내 톰 크루즈의 엄지 불쑥 한 번에 '꺄악 오빠, 사랑해요'를 내뱉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지경에서 명수와 나를 향한 그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야! 우리는 이 영화 한 번 더 보고 갈 테니까, 너희들은 알아서 가. 오늘 즐거웠어.”
우리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둘은 매표소를 거쳐 극장 안으로 다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명수와 나는 당황과 허탈이 적절히 비벼진 씁쓸한 기분으로 서로를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마른 코를 양껏 들이마시던 명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진우야, 니 차비 있나? 집으로 갈 차비. 혹시 회수권 두 장 없나?”
“없다. 아까 비후까스…”
“그래? 그럼 걸어가자. 좀 춥긴 해도, 걷다 보면 곧 열이 날 거다.”
“톰 크루즈, 잘 생긴 건 맞다, 그쟈?”
서면 로터리를 지날 즈음에 명수가 물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명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진우야, 톰 크루즈가 우리를 보면 뭐라고 하겠노? 좀벌레처럼 생겼다고 안 하겠나?”
“임마, 아무리 그래도 좀은 아니다. 장수풍뎅이 정도?”
“잘 생겼는데 이름도 멋지네. 톰 크루즈. 그럼 나는 오늘부터 좀 크루즈 할란다. 그렇게 불러 주라.”
그러면서 명수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붕붕방방방 붕방방. 알듯 말듯 귀에 익은 듯 낯선 곡조였다.
“그건 무슨 노래고?”
“아까 영화에서 나온 거다. 붕붕방방방 붕방방, 붕방방 붕방방.”
한참을 듣다 보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나중에 제목을 확인한 것이지만) 탑건의 주제곡 Take my breath away의 전주前奏, 첫 부분이었다.
졸지에 톰 크루즈에게 연인을 빼앗겨 버린 불쌍한 십 대 소년 둘은 그렇게 붕방방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집을 향해 한참 동안 걸었다.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미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도 꽤나 추웠던, 성탄절을 일주일 앞둔 1987년 12월 19일 저녁이었다.
아내가 영화 ‘탑건:매버릭’을 보라며 티켓을 보내왔다. 명수와의 에피소드를 알 리 없는 아내는, 혼자 멍하니 있지 말라는 부탁을 계속 되풀이했다. 탑건, 매버릭. 36년 만에 만들어진 속편이라고 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기는 했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톰 크루즈는 그때처럼 여전히 잘 생겼고, 전투기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그는, 역시나 매력적이었다.
오토바이와 비행기 뒷좌석에 앉아 있는 미애와 주희가 생각났고, 그날 저녁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붕방방을 흥얼거리던 명수가 다시 생각났다. 이제는 내 곁에 없지만 내 친구가 생전에 무척이나 좋아했던 노래인데다 유쾌한 추억마저 되새길 수 있으니 밤늦도록 스무 번이 넘는 리플레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명수야, 미애와 주희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톰 크루즈가 방한할 때마다 우리 생각,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다, 잘 모르겠다. 근데 기억해본들 또 뭐하겠노? 못생긴 우리는 그냥 노래나 부르자. 그래, 니 말이 맞다. 그냥 노래나 부르자. 오늘은 니가 먼저 불러라. 반주는 내가 할게. 그래, 시작한다? 붕붕방방방 붕방방, 붕방방 붕방방. 와칭 에브리모숀 인마이 풀리시 러버즈 게이이이임, 테잌 마이 브레써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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