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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ug 02. 2021

자전거의 추억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엄마의 표정이 심상찮다. 잘못한 것도 딱히 없지만 공연히 불안해서 눈치를 살폈다. 한참 만에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는 하루에 변소 몇 번 가노?"

"왜? 동사무소에서 조사 하드나?"

"그건 아닌데, 여하튼 몇 번 가노?"

"음, 배 아플 때마다 가고, 음, 보통 두 번은 가는 것 같은데..."

"그라믄, 인자 웬만큼 급한 거 아니면 학교에 가서 누라, 알겠제?"

"왜?"


묻기는 했지만 듣지 않아도 뻔한 답이었다. 어제 똥차가 와서 변소를 푼 것을 나는 안다. 보나 마나 집주인인 정훈이 엄마가 또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모두 다섯 집이 세 들어 사는데 우리 가족이 제일 사람 수가 많으니 당연히 요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 그것은 한두 번 듣는 말이 아니었다. 변소를 풀 때마다 되풀이되는 정훈이 엄마의 억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세를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이 또 엄마를 속상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억울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오죽하면 엄마가 그럴까 싶어 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가방을 던져두고 밖으로 나갔다. 숙제 안 하냐는 엄마 말을 대문 에서 얼핏 들었다.




콧등에 땀이 송송 맺혔다. 자꾸만 숨이 가빠진다. 짐받이를 잡은 손이 또 미끄러질 것 같다. 그냥 놔버릴까 하다가 그랬다간 달리는 속력에 오히려 내가 자빠질 것 같다. 이젠 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발아래로 휙휙 지나가는 돌멩이를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스껍다. 한 손으로 뒤를 겨우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땀을 훔치며 다시 매달려간다. 이제 한 바퀴만 더 돌면 된다. 그러나 너무 힘들다. 모퉁이를 돌 때 속력이 늦어지면 슬쩍 놓아 버려야지 생각한다. 그때 정훈이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를 지른다.


"똑바로 밀어라, 임마!"


벌써 한 시간째 나는 정훈이의 자전거를 밀고 있다. 동네 두 바퀴를 밀면 내게 한 바퀴를 타게 해 주겠다는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다. 그러나 정훈이는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별의별 핑계를 대면서 저 혼자만 즐기는 중이다. 진작에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이번엔, 이번엔 하다 보니 벌써 한 시간째 이 짓을 하고 있다.


뒤에서 미는 걸 알면서도 녀석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꽉 잡아서 내가 제 궁둥이에 머리를 처박게 하기도 했다.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될 것을 지그재그로 핸들을 틀어 내 발을 꼬이게 하는가 하면, 돌멩이가 앞에 있으니 후진해야 된다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아니꼽고 더럽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밀고 있는 걸 보면 제 녀석도 감동한 바가 있어서 한 번은 태워 주겠지. 적어도 사람이라면 말이야. 나는 자전거를 꼭 한 번 타고 싶었다.




정훈이의 자전거는 솔직히 멋있었다. 바퀴에 빽빽한 은빛 살에는 색색이 줄을 감아서 그것이 돌아갈 때면 무지개보다 더 멋지게 보였다. 손잡이 양 끝으로는 오색 고무가 늘어져 바람 소리를 내며 흩날렸다. 오른 손잡이에 붙은 까만 단추를 누르면 우주선 모양의 통에서 불이 번쩍거리며 왱왱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불통 앞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태권 브이가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은 채 멋들어지게 날고 있었다. 그것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주먹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이른바 입체 로보트였다. 정훈이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 줬다는 이 자전거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이들 사이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한 번만 더 돌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타게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출발지인 반장 집 구멍가게 앞으로 다시 왔을 때 나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태워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애절한 표정으로 녀석의 선처를 기다렸다.

"정훈아, 이제는 내 차례..."

"안돼, 이번엔 손잡이 고무가 멋지게 날질 않았어. 이게 옆으로 나란히 날려야 된단 말이야. 다시!"


더러운 놈. 명수는 한 바퀴만 밀어도 잘만 태워주더니. 좋다. 이번엔 진짜 잘 밀어야지. 정훈이는 또다시 노래를 부르며 방향을 잡았다. 어느 정도 속도가 붙었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헉헉, 정훈아, 이제, 고무가, 날리나?"

"아냐, 아직이야, 임마. 더 빨리!"

"지금은?"

"더 빨리!"

"그래, 더 밀, 테니까, 날리는지, 꼭, 봐라."


젖 먹던 힘을 다하는데 또 무슨 심통인지 녀석이 브레이크를 살짝살짝 잡는다. 나는 정훈이를 감동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더 힘껏 밀었다. 내가 힘을 더하는 것을 느끼는지 녀석은 일부러 제법 세게 브레이크를 잡는다. 그때 녀석의 자전거가 갑자기 홱 자빠졌다. 정훈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딴전을 피우다가 길 옆의 돌을 들이받은 것이다. 녀석의 두 다리는 공중에서 한참 동안 버둥거린 다음에야 땅에 처박혔다. 나 역시 달리던 속도 때문에 길 옆으로 굴렀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정훈이었다.


"야, 정훈아."

정훈이를 잡아 세우려는데 녀석이 땅에 엎드린 채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억지로 일으킨 녀석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가 박살이 났는지 피범벅이 되었고, 넘어질 때 땅을 짚었던 손도 까져서 피가 흘렀다. 야, 정훈아, 임마. 난 그냥 밀라고 해서 밀었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대충 흙을 집어 정훈이 얼굴에 처발랐다. 신문지를 주워와 코 언저리를 쓱쓱 문질렀다.

"으아앙, 씨이 너 임마, 다 일러뿔 거다. 으아앙."

"내가 뭘, 나는 그냥 밀기만 했는데..."


정훈이의 얼굴보다 더 큰일이 난 건 태권브이, 아니 자전거였다. 번쩍거리는 우주선 불통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엄청 비쌀 텐데. 이제 어떡하지? 부서진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왔다. 정훈이는 집이 가까워지자 더욱 큰 소리로 악을 썼다. 나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집 안에서 누가 달려 나왔다. 정훈이 아빠였다.

"아저씨요, 나는 그냥 자전거 밀어줄라 캤는데.."

철썩.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 했다. 정훈이 아빠가 내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구멍가게 아줌마가 달려 나올 때까지 얻어맞았다. 볼이 얼얼했다.

"너 이놈의 자식, 정훈이를 어떻게 한 거야?"

"아저씨요, 그기 아니고..."

정훈이 아빠가 이번엔 발길질까지 했다. 이게 아닌데.




꽤나 많이 맞았다 싶은데 갑자기 매질이 멈추었다. 살며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정훈이 아빠의 팔을 잡고 서 있었다. 아버지를 보자 왈칵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는 울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정훈이 아버지, 우리 애가 뭐를 잘못 했능교?"

"보면 모르능교? 이 자식이 우리 정훈이를 이 꼴로 만들었다 아입니꺼."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맞나?"

"아닙니더. 나는 한 바퀴 태워준다 캐서 밀었는데 돌에 걸려 넘어진 것뿐입니다."

정훈이 아빠가 또 소리를 쳤다. "거짓말 마라, 요놈의 새끼야."

아버지가 맞받았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애를 때려도 됩니까?"


고성이 오갔다. 정훈이 아빠는, 평소에도 내가 정훈이를 자주 때렸다는 말을 지어냈다. 다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더니 무슨 말끝에 정훈이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잔말 말고 방 빼소!”

그 소리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기선을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정훈이 아빠가 더 성화를 부렸다. 그리고 욕설이 붙은 말을 끝내 던졌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 주제를 알아야지!"


그 말과 동시에 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정훈이 아빠가 길바닥에 발랑 드러누웠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정확히 보지 못했다. 대신 정훈이 아빠의 얼굴 위로 아버지의 주먹이 두어 번 왔다 갔다 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고 정훈이 아빠는 경찰을 부르라며 난리쳤다. 길에 누운 채였다. 혹시나 아버지가 잡혀 갈까 봐 걱정이 되었만 다행히도 경찰은 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저녁, 숙제도 열심히 해 놓고 모처럼 다음 날 가방도 챙겨 두었다. 잠자리에 들려는데 아버지가 나를 불러 앉혔다. 야단을 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가 내게 손을 뻗었다. 움찔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물었다.


"자전거, 갖고 싶나?"




일주일 즈음 지나서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정훈이네 집보다 방은 약간 좁았지만 전학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주인 아줌마가 나를 좋아했다. 남편은 월남파병갔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고, 고등학교 다니는 훈식이 형이랑 아줌마랑 둘이서 산다고 했다. 그 집은 안채뿐만 아니라 마당에도 변소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눈치를 보면서 변소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버지 새 자전거를 사 주셨다. 이번에도 역시 태권브이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은 채 푸른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었다.


악의 무리, 정훈이 엄마!!



Image by Pezibea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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