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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02. 2021

산딸기의 추억

중님, 거 장난이 좀 지나치신 것 아뇨


냅다 지른 슛이 골대를 벗어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만 뒷담 창살에 꽂히고 말았다. 터져버린 공 때문에 순식간에 풀이 죽은 아이들은,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재촉이 있기 한참 전인데도 뿔뿔이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졸지에 공 값을 물어내게 된 창기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월의 낮은 길었다. 조금만 더 더워지면 여름 방학이 될 텐데, 불어오는 바람에 땀은 금세 식었다. 애먼 돌팔매질로 화를 삭이던 창기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우리, 마하사 갈래?”

“마하사?”

“응, 지금 가면 떡도 먹고 사탕도 받을 수 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창기는 그런 것들을 잘 알았다. 하긴, 나도 엄마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려면 두어 시간은 더 남았다. 벌떡 일어서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뿌연 먼지가 또 날렸다.




마하사摩訶寺는 학교 건너편, 그러니까 황령산荒嶺山 자락에 있는 절이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이 근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했다. 천지天地가 철쭉으로 뒤덮이는 봄이 되면, 전교생이 줄을 지어 마하사 뒷산으로 소풍을 간 적도 많았다.


조무래기들 몇몇은 황령산 입산금지入山禁止를 입에 달고 살았다. 무턱대고 갔다가는 산지기 할배에게 걸려서 매타작을 당한다고도 했고, 작년에 목매달고 죽은 숙희 누나가 흰옷을 입고 뛰어다닌다고도 했지만 정작 본인이 매를 맞았다는 녀석도, 숙희 누나를 직접 맞닥뜨렸다는 녀석도 없었다. 말만 그랬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낮이라도 은근히 겁이 났다.


그래서 마하사에 가는 동안, 산지기 할배나 숙희 누나가 나타나지 않게 해달라고 혼자서 속으로 빌었다.




깔딱숨을 두어 번 쉰 다음에야 겨우 마하사 입구에 닿았다.


창기가 두 손을 모으더니 절문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나도 따라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되는 것 같았다. 곧 절문을 통과하려는데 이번에는 이층 집만큼 키가 큰, 눈이 부리부리한 도깨비들이 칼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서웠다. 창기는 거기에다 대고 또 절을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자잘한 돌들이 잔뜩 깔려있는 절 마당으로 올라섰다. 내 한아름이 넘는 기둥들이, 멋들어진 기와지붕을 받치고 우뚝 솟았다. 지난 소풍 때 다녀간 기억이 났다. 그 아래로 할머니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대체 떡이랑 사탕은 어디서 받을 수 있는 건데?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창기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라서 돌아보았다. 회색 옷을 입은 대머리 할아버지였다. 창기가 아까처럼 또 두 손을 모았다. 나도 급히 따라 했다.


“중 할아버지, 근데요, 어디 가면 떡 줍니까?”


아, 진짜 무식한 놈. 중 할아버지가 머꼬. 중님이라고 해야지.


눈이 말똥말똥한 창기를 보더니 중님이 허허 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대뜸 창기의 손을 끌어다가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곧 내 손 안에도 물컹한 것이 한 움큼 들어찼다.


“사탕보다 이게 맛있을 거다. 먹어보렴.”


천천히 손을 폈다. 그것은 산딸기였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냉큼 입으로 가져갔다. 보들보들한 첫인사에 입술이 놀라고 말캉 바스러지는 감촉에 이가 맞장구를 쳤다. 농밀한 감탄이 입안에 성큼 들어섰다. 왜 이제야 왔냐는 반가움에 혀가 몸부림쳤지만, 미처 목구멍에 닿기도 전에 스르륵 녹아버렸다. 아아, 꿀들아, 이제 너희에게 작별을 고하노니 설탕의 손을 잡고 얼른 저 멀리로 사라지거라. 아아, 산딸기여. 너를 두고서 감히 저것들을 달콤하다고 말했던 나의 지난날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야! 정신 차려, 너 겨우 열한 살이야. 어울리지 않게 어디서 이런 문장을!)


달콤한 순간은 짧았다. 한 움큼은 한입에 미치지 못했다.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창기는 용감했다.


“할아버지, 이것 좀 더 주세요. 정말 맛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걸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데를 내가 알려줄까?”


답을 하기 전에 우리들의 고개가 먼저 끄덕였다. 그런데 중님이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럼 너희들, 저기 큰법당에 들어가서 부처님한테 세 번 절하고 와라. 그러면 이 할아비가 산딸기 밭이 어딘지 알려줄게.”


그냥 한 주먹 정도면 되는데 심지어 산딸기 밭이란다. 창기와 나는 서둘러 신을 벗었다. 운동화가 댓돌 아래로 굴렀다. 마루가 삐걱 소리를 냈다. 커다란 부처님이 가운데 앉아 있었다. 부처님, 저 중님이 산딸기 밭, 진짜 알려주시는 거 맞죠?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알겠죠? 부처님이 웃으면서 오케이 하셨다. 손 모양이 그랬다.


창기와 나는 나란히 서서 공손하게 절을 했다. 세 번 하라고 했으니 정확하게 세 번 했다. 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삐져나왔다. 세상에나, 산딸기 밭이란다. 이까짓 절, 삼십 번, 삼백 번도 더 하겠다. 산딸기 밭을 알려준다는데 절 세 번쯤이야.




중 할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뒷길을 따라 내달렸다. 누가 먼저 다녀갈까 봐 마음이 급했다.


오분 정도 풀숲을 더듬자 과연 붉은 산딸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산딸기 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아아아아. 창기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닥치는 대로 산딸기를 따서 입에 털어 넣었다. 절로 웃음이 났다. 중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입과 손이 그렇게 협업協業을 잘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창기가 나를 불렀다. 왜 그러지? 뱀 나왔나?


“이거, 우리 담임 선생님 갖다 드리자.”


지난 스승의 날에 아무런 선물도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두고두고 창피하게 생각했다. 집안 형편이 그랬다는 건 핑계였다. 오십 원, 백 원씩 모으기만 했어도 모나미 볼펜 한 자루쯤은 충분히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저마다의 선물을 들고 교탁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산딸기 선물이라니, 창기야. 정말 좋은 생각이다. 나는 엄지를 번쩍 세워 보였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 담지? 담아갈 그릇이 없잖아? 어떡하지?" 

창기가 갑자기 셔츠를 벗었다. 그 바람에 개구리처럼 앙상하게 마른 맨몸이 드러났다. 풀었던 단추를 다시 잠그고 두 소매를 서로 묶었다. 소매와 양쪽 옷자락을 한꺼번에 들어 올리자 제대로 된 보따리 가방 하나가 뚝딱 마련되었다. 이런 총명한 녀석. 우리는 아까보다 더 정신없이 산딸기를 땄다. 얼추 한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남은 산딸기가 없었던 만큼 한눈에 봐도 보따리는 꽤나 불룩했다. 이제 내려가자.


절문을 지날 때 우리는 다시 두 손을 모았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그리고 중 할아버지. 길을 내려오는 내내 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입안 가득 들어찬 산딸기가 우리의 노래를 거들었다.


“임마, 중 할아버지가 뭐꼬,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중님이나 중 할아버지나 마찬가지다. 근데 진짜 뭐라고 불러야 하노?”




하루가 지나긴 했지만 산딸기는 그래도 싱싱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담임 선생님은, 감격했다는 말로 우리를 칭찬했다. 부끄러웠지만 뿌듯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은 산딸기를 맛있게 드셨다. 침이 고였지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칭찬의 박수는 덤이었다.


“이젠 묘숙이 차례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창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묘숙이는 창기가 좋아하는 우리 반 여학생이었다. 산딸기를 따서 묘숙이에게 주고, 그걸로 점수를 딸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친구가 사랑을 쟁취하겠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제 모조리 쓸어버린 탓에 산딸기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창기가 말했다.


“스님한테 가서 물어보자. 그럼 다른 데를 또 알려주실 거 아이가.”


좋은 생각이었다. 절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한참 만에 큰법당 문이 열리고 스님이 나왔다. 쪼로로 달려갔다.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 다행히 스님이 우리를 알아보았다. 어제 딴 산딸기는 모두 선생님께 드렸다고 했다. 칭찬을 겸해서 다른 정보를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스님이 또 웃었다.


“그래, 참 잘했구나. 그럼 내가 다른 곳을 알려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오늘은 부처님 앞에서 절을 백여덟 번 해야 된다. 어제보다 훨씬 더 맛있는 산딸기가 잔뜩 있는 곳을 알려줄 건데, 어떻게 할래?”


스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법당의 문을 열었다. 백여덟번? 쳇,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혹시 헷갈릴지 모르니 한번 절할 때마다 하나씩 세기로 했다. 준비됐나? 됐다. 그럼 시작한다? 시이작.


십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백여덟 번의 절을 마쳤을 때 창기도 나도 이마에서 얼굴로, 목에서 등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딸기밭을 휘저을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쉴 겨를이 없었다. 다시 절 마당으로 나갔다.




스님이 알려준 곳을 아무리 뒤져도 산딸기는 없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그 주위를 한 시간이 넘도록 헤맸다. 결국 산딸기 밭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절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 자리에 스님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 산딸기 밭이 없던데요. 혹시 잘못 알려주신 거 아닙니까?”

“아냐. 그럴 리 없어. 내가 조금 전에도 다녀왔는데?”

“아닌데요. 진짜 없던데요!”


창기가 결국 화를 냈다. 코에서 식식 김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 창기를 물끄러미 보던 스님이 또 허허 웃었다.


“아하, 알겠다. 너희들이 절 하는 동안에 부처님이 모두 잡수셨나 보다.”




“중 할배, 부처님 부하 주제에. 거짓말쟁이, 공산당.”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찍어냈던 창기는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것 같았다. 스님한테 속았다는 것보다, 치밀하게 준비했던 묘숙이 공략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아쉬움이 더욱 큰 듯했다. 창기를 달랬다.


“그래도 스님 덕분에 담임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고, 또 절도 많이 해 봤다 아이가.”

“절은 내가 니보다 좀 더 잘했다, 맞제?”

“나는 아까 육십 번 넘어가니까 방귀가 나오더라.”

“뿌웅 소리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기분 나빠서 혼자 산딸기 다 드신 거다, 맞제?”

“산딸기, 또 묵고 싶다.”

“우리 할매도 산딸기 좋아하는데…”


열한 살은 그렇게 단순한 나이였다. 화가 났던 것도 금세 잊어버렸다. 창기는 이제 집으로 가야겠다며 일어섰다. 저만치 멀어지는 창기의 셔츠가 펄럭였다. 등에는 산딸기 물이 밴 그대로였다.




저녁이 되자 끙끙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공부를 그렇게 좀 하라며 엄마가 나무랐다. 축구 때문이 아니라고 대들었다. 스님한테 속아서 이렇게 된 건데,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스님이 너희 같은 코흘리개를 왜 속이겠냐며 아버지도 놀렸다. 결국 나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버지가 또 크게 웃었다.


“백팔배를 했단 말이가? 와, 우리 아들 대단하네? 근데 아버지 생각엔 말이다. 너거를 보니 아마도 주지스님이나 부처님이나 이심전심이셨던갑다.”


이심전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달콤했던 산딸기가 떠올랐다. 내일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지났으니 또 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중 할아버지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냥 가야겠다. 그런데 절을 하고 가야 할까? 그냥 가도 될까? 적어도 세 번은 해야 되지 않을까?


백여덟 번 절을 다시 할 생각을 하니 다리가 또 저려오기 시작했다.





염화시중 拈華示衆


석가모니가 연꽃을 따서 들고 대중들에게 보임.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도道를 전함. 세존념화가섭미소 世尊拈華迦葉微笑 석가세존이 연꽃을 보이니 가섭이 미소한다. 拈華微笑


이심전심 以心傳心, 불립문자 不立文字, 교외별전 敎外別傳 [출처 : 한시어사전]




Image by Hans Braxmei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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