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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01. 2021

친구의 추억 (4)

어느 날 그렇게 그리웠다


“몸살이라면서 어디 가노!”


대문을 나설 때 엄마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뉴스가 틀렸기를, 우현이 집이 아니기를, 이 호들갑이 그저 오지랖으로 끝나기를. 버스 정류장까지 정신없이 뛰었다. 기다릴수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일찌감치 택시를 타야 마땅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한참 만에 버스에 올랐다. 근길 느릿느릿 거북이 운행에 마음이 서둘렀다. 제발 좀 빨리 가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재촉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한편 이층에서 잠을 자던, 부부의 아들 전 모 군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현재로서는 실종 상태입니다. 또한 주방 바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가정부 장 모 씨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경찰은 정확한 화재 원인을 감식하는 한편…”


우현이 집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 입구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제발 아니기를. 부디 그대로 있기를. 그것을 조건으로 내민다면, 어떤 신神이라도 섬기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골목의 끝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매캐한 냄새가 코 끝에 와닿았다.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아, 이럴 수가. 한마디로, 처참했다.


출입 금지 팻말이 붙은 노란색 테이프가 이리저리 둘러져 있었다. 붉은 벽돌은 제 색깔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시커멓게 그을렸고, 불을 끄느라 뿌렸을 소방수水는 검은 눈물처럼 담벼락을 타고 얼룩져 내렸다. 대문은 반쯤 녹은 채로 위태롭게 매달렸고, 잔디 마당 건너에 있던 탁자는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네는 한쪽 줄만 간신히 부들거렸다. 까만 재를 온통 뒤집어쓴 그랜저는 앞뒤 유리창이 완전히 깨져 있었다. 흉가凶家와 다름없었다. 무너진 벽 아래 잿더미에서 아직도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만치서 동네 사람들 몇몇과 조무래기 서넛이 코를 틀어막고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한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거기 가면 안 된다. 위험해.”


경찰복을 입은 남자였다. 아저씨, 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텁텁한 것이 목구멍을 막았다. 한 발 물러섰다.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저 어디쯤이 우현이 방이었는데. 그 아래로 계단이 있었고, 화려한 거실은 저기서부터, 주방은 또 저기. 그런데 몽둥이를 든 삼촌이, 화장이 진한 그 여자가, 울고 있는 우현이가 갑자기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끝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저씨, 여기가, 내, 친구, 집, 인데요, 내 친구, 우현이 좀, 찾아, 주세요.”


경찰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내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불타 버린 집을 보면서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아직 몸살이야?”


막 출근한 담임 강영린 선생님이 미처 교무실들어서기도 전에 내가 먼저 서둘렀다. 선생님, 그저께 밤에 우현이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결석한 겁니다. 그런데 우현이가 사라졌습니다. 또 하루 결석쯤이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선생님은, 불이 났으며 우현이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나는 내친김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했다.


"경찰 이 자식들은 애가 안 보이면 학교에 알려줘야 될 것 아냐!"


화가 난 선생님이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방송국이었다. 무언가를 받아 적더니 이번에는 다시 경찰서와 대동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통화를 끝낸 선생님의 표정은 꽤나 어두웠다. 선생님이 잠시 망설였다.


“추가로 발견 시신은 아직 없다는데?”


휴대폰은 고사하고 삐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참고할 것이라곤 생활기록부가 유일했다. 우현이에게 친척이 있을 리가 없다. 역시나 아무리 훑어보아도 도움이 될 만한 전화번호 따위는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일단 기다려보자. 기다리자구요? 그래, 지금은 그것 말고 방법이 없잖니.


그날도,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우현이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매일같이 경찰서와 병원, 그리고 방송국으로 전화를 했다. "우리 반 학생입니다.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입니다. 당신들,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전해지는 말은 똑같았다. 열흘이 지나도록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현이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동안 여름 방학이 되었다.


나는 변함없이 가방을 챙겨 학교에 나갔다. 독서실보다 편하기도 했지만, 교실에 들어서면, 지금 오니? 하며 우현이가 반길 것만 같았다. 등하교 길에도 혹시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우현이 집 앞에도 다시 가 보았다. 타고 남은 건물 철거가 한창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잿더미도, 이층 양옥집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우현이가 돌아오더라도 이제는 머물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울적했다.


이따금씩 남포동 극장가를 무작정 걸어 다니거나 내친김에 용두산 공원에도 가 보았다. 큰 맘먹고 표를 끊어 전망대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계단 언저리에 있는 풍차의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기도 했다. 그때 나랑 같이 왔던 친구,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많이 찾아간 곳은 광안리 바닷가의 방파제였다. 파도 소리도, 갈매기 소리도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현이를 볼 수는 없었다. 다시 개학날이 되었다.


우현이는 무단결석으로 유기 정학을 받은 다음, 무기정학에 이어 결국 퇴학 처리되었다. 정해진 교칙校則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기다려 보자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친구라는 것. 그것은 전혀 명분이 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전화라도 한통 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살아있다면 말이다. 잠시 얼굴만 보여줘도 되는 것 아닐까? 역시 살아있다면 말이다.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데 오지 못할 이유는 대체 뭘까? 혹시 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 속에서? 시끄러워! 집어 쳐! 나는 혼자서 묻고 혼자서 답하고, 혼자서 욕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우현이가 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꺼내 들고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가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 사람은 금세 무뎌진다. 그렇게 우현이는 조금씩 잊혀 갔다.


나는 졸업을 했고, 대학에 입학했고, 입대와 제대를 했고, 다시 졸업을 했고, 취업을 해서 서울로 왔다. 그러는 동안 우현이는 어쩌다 가끔 생각이 나는, 오랜 기억의 한 조각이 되어 버렸다.


옛 동창을 다시 만나는 것이 대유행大流行던 때가 있었다. 그때조차도 우현이를 기억하는 동기들은 드물었다. 할 수 없이 ‘칼자국’이라는 별명을 들먹여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섯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던 데다 친구라고는 내가 거의 유일했으니, 다들 우현이를 기억 못 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2002년 가을, 나는 지금의 아내와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며칠 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명록을 기준으로 손님과 축의금을 확인하는 중인데 정확하게 누구의 손님인지 알기 어려운 하객賀客이 몇 있다고 했다. 최윤석이 누구냐? 방송국에서 일하는 제 후배예요. 김재령은? 친한 기자 누납니다. 그날, 인사받으셨잖아요. 그럼 김민하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식으로 아버지의 궁금증을 하나씩 해결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군지 알겠나? 축의금이... 어디 보자... 와, 백만 원이나 했네. 이름이, 전, 우, 현?”


순간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 누구라구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응, 전우현. 와?  아는 사람이가?” 아버지, 그날 축의금 누가 받았었죠? “니 사촌 형들이 받았지.” 나는 급히 형님들께 전화를 걸었다.


“형님, 하객 중에 전우현이라는 사람, 얼굴 기억나세요? 축의금은 백만 원. 그렇죠, 워낙 손님이 많아서. 그러면 축의금 내러 온 사람이나 하객 중에 혹시 얼굴에 깊은 상처, 그러니까 말하자면, 칼자국이 있는 사람 보셨어요? 아니면 화상을 입은 흔적이 있다던가. 아, 잘 모르시겠다구요. 네네.”


소득은 없었다. 친구들 몇몇에게도 확인했지만 기대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조만간 부산으로 내려가서 결혼식장의 CCTV를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선 기분은 좋았다.


‘그래, 우현이가 다녀갔어. 맞아, 그렇게 사라졌으니 마음이 불편했겠지. 하지만 늘 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잊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 결혼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겠지. 그럼 그렇지. 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십오 년? 하하.


이젠 웃음까지 나왔다. 아내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부푼 기대와 서툰 희망은 채 하루도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했다.


“내 정신 좀 봐라. 그 전우현이란 사람 말이다. 목수들 모임 회장이다.  전 목수라고만 부르니까 이름을 알 턱이 있나. 전우현이. 돈 잘 번다고 백만 원씩이나 부조를 했네. 니는 인자 신경 안 써도 된다, 알겠제?”




삼십 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가끔 우현이가 생각난다. 아니, 가끔 우현이를 생각한다.


이차 함수를 풀고 아이처럼 좋아하던, 스탠드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기 집에 놀러 가자던, 피멍 든 허벅지를 애써 감추려던, 우리 집을 부러워하던, 내게 구두를 사 주던, 바닷가에서 맥주를 마시던,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던, 그리고 택시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던 잘 생긴 우현이를 생각한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바란다. 불이 났을 때 그 감옥 같던 집을 무사히 빠져나갔기를, 서랍 챙기는 것을 절대 빠뜨리지 않았기를,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무사히 어른이 되었기를, 미국에 가서 수술을 잘 받았기를, 소원대로 엄마를 다시 찾았기를, 행복을 찾아서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았기를, 그리고 친구인 나를 잊지 않았기를.


과연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는 또 희망한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 따뜻한 악수를 할 수 있기를, 그때 함께 바라볼 바다는 열일곱 그때처럼 변함없는 푸르름으로 가득하기를, 그리고, 


내 마음속에 여태 담아둔 질문 하나를 꼭 할 수 있기를.




* 마지막 단락 영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을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 Title Image by Joshua Woroniecki from Pixabay 

* Image of Hawaii By J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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