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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1. 2021

젓가락의 추억

어떻게든 글 잘쓰고 밥 잘먹고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 오자.


선생님이 한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공책에다 코를 박고 정성스럽게 한 자 한 자 적었다. 받아쓰기에 집중한 탓에, 흘러내리는 콧물을 멈추는 것도 잊고 잠시 숨도 참았다. 그래서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교실 여기저기에선 흐읍 하아 하며 참았던 숨을 내쉬거나 다시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이어졌다.


자, 다음 문제. 창, 밖으로, 햇볕이, 밝게, 빛났, 습니다.


문장을 받아 쓰려다 말고 나는 연필을 멈추었다. 선생님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 생각하는 척하다가 선생님이 다른 분단으로 간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뒤에 다시금 한 글자씩 썼다. 창, 밖, 으, 로, 햇.


그때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탁 쳤다. 그 바람에 연필이 공책 위로 주욱 미끄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저만치 간 줄 알았던 선생님이 바로 내 뒤에 서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이야, 너 연필 계속 그렇게 잡으면 이젠 혼난다?


순간, 뜨끔했다. 귓불이 또 달아올랐다. 그랬다. 나는 연필 잡는 방법이 엉터리였다.


저는 4번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1Boon)


새 공책 맨 앞장엔 언제나 ‘연필을 올바르게 쥐는 법’이 그려져 있었지만, 그걸 따라 하면 이상하게도 나는 손가락이 아팠고, 나중엔 손목까지 저리는 듯했다. 나는 그냥 내가 편한 대로 연필을 쥐었다. 부모님을 대신해서 내 공부를 돌보았던 누나가 그걸 문제 삼아 가끔 야단을 쳤다. 하지만 시험을 치면 곧잘 백 점을 받아오곤 했으니 누나의 타박과 고자질이 종종 있었음에도 부모님은 딱히 말씀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달랐다.


내가 연필 쥔 것을 볼 때마다 선생님들은 야단을 쳤다. 그러다 보니 결국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혼이 나면서도 연필 쥐는 법을 고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잔꾀를 부려서, 선생님이 본다 싶으면 올바른 척 잡았다가 발각의 위기를 모면한 다음에는 원래대로 고쳐 쥐기를 되풀이했다. 연필이야 어떻게 쥐든 시험만 잘 치면 되지, 공부만 잘하면 되지. 그것이 그때의 내 똥고집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벌써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이 되자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에는 국산사자음체 이렇게 6교시까지 수업이 있었다. 그 날은 당연히 도시락을 가져갔다. 식사를 하기 전에 선생님은 혼분식 검사를 했다. 보리쌀 한 톨 없는 흰쌀밥이라고 몇몇은 야단을 맞았다. 나는 혼식을 잘했다고 칭찬을 들었다. 부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옆에 앉은 명수와 떠들어 가며 한참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식사를 먼저 마친 김명숙 선생님이 아이들 사이를 다니다가 갑자기 내게 그러신다.


아니, 제이야. 너는 젓가락질이 왜 그래?


그 말에 나는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곁으로 다가온 선생님이 내게 젓가락을 다시 잡아 보라고 하신다. 나는 책에서 본 대로 고쳐 잡고 어설픈 젓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찬 하나를 집어 보라신다. 하필 콩자반이다. 당연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젓가락질이 시원찮기는 내 짝 명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한참 동안 우리를 말없이 보고 계셨다.


저는 3번이었습니다 (사진 출처 : 인벤)


며칠 후, 마지막 수업이 끝나갈 무렵에 선생님은 몇몇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 불린 사람들은 청소 후에 남으라고 했다. 나와 명수를 포함해서 어림잡아 열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청소 검사를 받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여태 남아있던 모두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 정해진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곧 칠판에 두 개의 궤도를 걸었다. 하나는 올바르게 연필을 쥐는 법, 다른 하나는 올바른 젓가락질 방법이라고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연필 잡기를 고쳐야 하는 아이들은 궤도의 그림처럼 연필을 쥔 다음, 선생님이 정해준 교과서 한 바닥을 베껴 써야 했다. 그리고, 젓가락질을 고쳐야 하는 아이들은 역시 그림대로 젓가락을 쥐고선, 선생님이 따로 나눠준 콩 오십 개를 이쪽 접시에서 저쪽 접시로 하나씩 옮겨야 했다. 선생님은 분단 사이를 오가면서 아이들의 연필 잡은 손과 젓가락 쥐는 방법을 하나씩 살펴 주셨다.


당연히 나는 선생님 바로 앞자리에서 한 바닥을 옮겨 쓴 다음, 따로 젓가락 연습까지 해야 했다. 그런 애들이 서너 명이었다. 연필에 비해서 젓가락 연습은 꽤나 재미있다며 명수 녀석이 킥킥거리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기도 했다. 연필과 젓가락 쥐는 것이 시원찮아서 보충 수업까지 받아야 했던 주제에,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선생님이 나를 엄청 좋아해 주신다며 집에 와서 자랑질을 했다. 그 말을 듣고 한심해하던 누나의 얼굴이 생각난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연필과 종이를 주며 학교 이름을 써 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연필을 잡자마자 아저씨는 갑자기 검은 봉지를 아이들의 얼굴에 덮어 씌웠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순식간에 봉고차에 싣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아저씨는 연필을 이상하게 쥐는 아이들만 골라서 납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지금 손목이 잘린 채 구포 시장에서 동냥질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소리지만, 김명숙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면서까지 우리의 버릇을 고쳐주려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의 도움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봉고 아저씨에게 납치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어쨌든 그 해 1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수업 후까지 남아서 콩을 집는 아이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 우리 반이었던 창훈이다.


평소에 말이 없어서 별로 눈에도 띄지 않았던 애가 우리와 함께 남았던 이유는, 창훈이가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연필과 젓가락질을 쉽게 고쳤던 아이들에 비해, 창훈이는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 잡는 것을 유독 어려워했다. 많이 힘들어서였는지 중간중간 울기도 했고, 언젠가 한 번은 창훈이 엄마가 학교에 다녀갔던 것도 기억난다.


물론 왼손잡이도 핸디캡으로 여겨지던 시절의 이야기다.


왼손잡이가 무슨 문제라도? (사진 출처 : 매경/조선일보)


그렇다. 노랫말처럼 젓가락질을 잘해야만 밥을 잘 먹는 것도 아니다.


연필을 이렇게 쥐든, 젓가락질을 저렇게 하든 살아가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겠으나,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그런 사소한 지적으로부터 적어도 두 가지는 자유로워진 것이니 따지고 보면 그 시절의 김명숙 선생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이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습관을 고치지 않았더라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과 별개로, 어쩌면 지금쯤 구포 시장에서 정말로 동냥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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