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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an 10.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3)

포기란 없다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나혜는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거즈가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였다. 소리를 들었는지 김 원장이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괜찮을까? 일주일 정도면 다 나을 수 있을까?”

“네, 형님.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때쯤이면 면접은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면접? 그걸 어떻게 알았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김 원장이 몸을 슬쩍 기울이더니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저 아가씨한테서 대충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세한 이야기는, 형님?”

김 원장이 손목 꺾는 시늉을 했다. 마음 같아선 한 잔이 아니라 백 잔도 더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토요일이다. 나혜의 치료가 대마무리되었으니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

나중에 시간을 맞추어보자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 주었다. 일주일치의 치료비를 계산한 다음, 그녀와 함께 병원 밖으로 나왔다. 아까보다 훨씬 따뜻해졌다.


접근 금지 명령 신청을 포함해서 즉시 할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를 일러 주었다. 그녀는 휴대폰에다 꼼꼼하게 메모를 했다. 직접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 더 이상은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개차반 같은 아비라 하더라도 남이 대놓고 개입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되는, 오직 그녀만의 가족사事였다.

아울러 다른 것도 다짐을 받아야 했다. 미리 눈치챘는지 나혜가 먼저 말했다.

“제이쌤, 치료 잘 받겠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다시 수업에 나갈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저에게 왜 이렇게 신경을 쓰시는지, 제이쌤이 어떤 분이신지 원장 선생님께 모두 들었어요.”

응? 대체 무얼 들었다는 걸까? 살짝 불안한 마음이 스쳤다. 어쨌거나 제 입으로 수업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그거면 충분했다.


나혜가 지하철 역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호준 형에게 다시 전화를 해야 하나 어쩌나 잠시 망설이다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의미 없는 일이다. 차라리 다른 호텔에 지원하자. 그게 더 맞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 노선을 검색했다. 사람답게 사는 방법도 클릭 몇 번으로 정답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인생人生 길치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다행히 나혜는 제 말을 지켰다. 얼굴을 가린 붕대가 꽤나 거슬렸을 텐데 변함없이 맨 앞자리에 앉아 당당하게 수업을 받았고, 친구들은 결석의 이유를 딱히 묻지 않았다.

일정에 따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호텔 면접이 하나둘 진행되었다. 그들은 사나흘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자기 일처럼 손뼉을 치며 축하해주는 나혜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최상급 호텔로부터 면접 요청이 여러 번 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얼굴 상태로는 면접 자체가 무리였다. 대부분이 바로 다음날 면접을 진행하자고 했던 것이다. 정중하게 일정 변경을 부탁해보았지만, 확인 후에 회신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마지막 답이었다. 그러는 사이, 종강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나혜는 마지막 치료를 받고 왔다. 붕대 없는 맨 얼굴을 보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면 상처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적당한 화장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챙기는데 그녀가 다가왔다.

“네, 무슨 일이에요?”

“제이쌤. 솔직히, 저는 이번에 어렵겠지요? 모레가 종강인데, 면접을 아직도 못 봤으니…”

낮은 목소리만큼 그녀의 얼굴에도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실제로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격려가 필요했다.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치료 끝났으니까 내일부터 면접 보면 되지. 걱정 말아요. 곧 연락이 다시 올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내가 있잖아요. 한 번 믿어봐요.”

나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저... 지금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휴대폰 대리점 사장님이 저를 정직원으로 채용하겠다 하셔서 그냥 그렇게 할까 싶어요. 그러니 제이쌤은 이제 더 이상 저에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서...”


정직원 채용이라, 어쩌면 지금 당장은 그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막연한 기다림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히 옳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그래 잘됐다, 그게 좋겠다는 말을 선뜻 할 수는 없었다. ‘호텔을 포기하고?’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를 내가 먼저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혜씨...”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말을 할 참이었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메시지였다. 이 늦은 시각에 누구지? 아내인가? 손을 살짝 들어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발신자를 먼저 확인했다. 뜻밖에도, 화면 가득히 뜬 이름은 ‘김호준 형님’이었다. 전화기는 진동을 멈추었지만 이제는 내가 떨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확인 버튼을 눌렀다.


내일 오후 2시, 강나혜 면접. 이번이 마지막 기회.


평소의 호준 형이었다면 하트가 대여섯 개는 족히 따라붙었을 것이다. 지금 하트 따윈 상관없다. 나도 모르게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다 두어 번 휘저었다.

“나혜야, 됐어, 이제 됐어!”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똥그랗게 뜬 나혜의 표정 역시 곧 나처럼 변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엔, 다른 분들의 양해를 미리 구하고 나혜 만을 위해 기도했다.

세 분, 이리 오시죠. 성모님, 부처님, 하느님. 오늘 각자 할 일들, 잘 아시죠? 길게 말 안 합니다. 이 아이, 무조건 꼭 합격시켜 주세요, 아시겠죠?


“오늘 또 누가 면접 봅니까?”

준현 매니저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눈을 감고 있으니 그에겐 당연히 그렇게 가늠이 된 것 같았다. 굳이 대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응, 엄청 중요한 면접이지.”


한 시 반쯤 되었을 때 나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미 호텔에 도착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제이쌤, 면접 잘 보고 갈게요. 최선을 다하겠지만, 혹시 떨어져도 미워하지는 마세요.”

그 말에 왜 그렇게 울컥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미워하긴, 누가 누굴 미워해.

면접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속사포처럼 읊어주었다. 전화를 끊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은 정말 더디게 흘렀다.


몇 가족이 체크인을 마쳤다.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네 시가 넘었구나. 왜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걸까? 혹시? 내가 먼저 해봐야 하나, 하는데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호준 형이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버튼을 꾹 눌렀다.

“네, 형님. 진웁니다.”

“합격이다.”


합, 격, 이, 다. 딱 네 마디.


읍읍읍. 나는 한 손으로 바지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았다. 별안간 높낮이가 바뀐 형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내 귓불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야, 진짜, 물건은 물건이더라. 네가 왜 걔를 그렇게까지 밀었는지 알겠더라. 전무님도 마음에 쏙 든다고 하시네. 정말 수고했어.”

억지로 참는 것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파아 하는 날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큰소리로 말해버렸다.

“형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두 형님 덕분입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허리를 접어가며 절을 해대니 준현 매니저도, 프런트를 지나치던 손님들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본인에게 합격 소식은 내가 바로 전할 테니까, 그리고 진우야.”

“네, 형님.”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살짝 긴장을 했다.

“이게 마지막이네, 다시는 안 보네,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그땐 진짜로 죽는다? 알겠어? 똑바로 해, 임마!”


형의 전화에 이어 나혜에게서도 연락이 왔답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누구나 편하게 다가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스스럼없이 조언을 구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무엇을 도와줄까 먼저 묻지 않아도 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들이 힘들어서 누군가를 찾을 때, 저만치에서도 잘 보이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고 아는 것 또한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저 나란히 앉아 들어주기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어른, 스스로 지나쳐온 청년 시절의 고민과 어려움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있다. 예상했던 것이든,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든, 혼자만의 힘으로는 버거운 삶의 고난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그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여덟 글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2022년 1월 10일 월요일, 나혜의 첫 출근을 온 마음으로 축하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끝]



* '나혜'는 본명이 아님을 일러둡니다. 양해 바랍니다.

* Image by habunma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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