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라불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Jan 09.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2)

좌절은 없다



급한 일이 생겨 잠시 외출하겠다고 했더니 준현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호텔 마당까지 따라 나왔다. 마침 앞을 지나던 택시를 얼른 잡아 탔다. 서면으로 빨리 가 달라고 했다. 어쩌면 나혜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 혼자 서둘렀다. 토요일 오전임에도 길 위에는 이유 없이 차들이 많았다. 막히는 도로만큼이나 내 마음도 답답하기만 했다.


출입문이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아버지가 나타났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드라마의 뻔한 장면들과 뉴스의 짧은 토막들이 머리를 스쳤다. 불쾌한 기시감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물론 나혜에게 직접 물어보면 쉽게 확인될 자초지종이었다. 지금의 관건은, 그녀가 나를 만나기 위해 과연 여기에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수업을 그만두고 호텔 취업을 포기하겠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그동안 준비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지금 그만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당당하게 그만둬라. 


시종일관 화난 어조로 그녀를 한껏 몰아붙였다. 교육원 앞으로 당장 나오라는 역정도 빠뜨리지 않았다. 꽤나 긴 시간 동안의 설득과 겁박 끝에 나혜는 결국, 알았으니 지금 나가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오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교육을 하는 선생과 수업을 받는 학생의 관계일 뿐 그녀의 사생활에 간섭할 권리도, 그녀의 판단을 강제할 명분도 내게는 없었다. 호텔 취업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하더라도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은 기수期數마다 한둘씩 꼭 있다. 나혜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가 만일 그쪽을 선택해서 오늘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전혀 없다.


다시 한번 답답함이 밀려왔다. 주머니를 더듬었다. 담배도 라이터도 호텔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길 건너 편의점에 다녀올 생각으로 막 일어서려던 참에 커피숍의 문이 또다시 열리는 소리를 냈다. 자그마한 체구 하나가 실내로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나혜였다. 번쩍 손을 들고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에요, 여기.”

옆에 앉은 몇몇이 찡그린 얼굴에다 짜증을 담았다. 어색한 고갯짓으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는 사이, 그녀가 조용히 다가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됐다.


나혜는 챙 달린 모자 위에 티셔츠의 후드를 덮어썼다. 게다가 얼굴의 대부분을 마스크로 가렸으니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창백하고 검은 두 개의 눈동자뿐이었다. 심지어 그 시선조차 내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커피가 테이블에 놓일 때까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커피잔을 감싸 쥐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얼핏 보았다. 추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한참 만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이쌔…”

“됐어요. 우선 커피부터 마셔요.”

손짓으로 그녀의 말을 애써 막았다. 하지만 나혜는 작정했다는 듯 다음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손을 닮았다. 마찬가지로 떨고 있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좋았을, 나 혼자의 가늠으로도 충분했을 상황들이 테이블 위에 투두둑 제멋대로 쏟아져 내렸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일일이 새겨듣자니 내 마음 저 구석에서부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식구가 처음으로 마련했던 원룸 시절에서부터, 부엌이 딸린 방 두 칸짜리 다세대 주택으로 옮겨 살게 된 이후 최근까지도 아빠는 나혜 몰래 엄마를 만나고 갔다고 했다. 얼굴과 몸에 남은, 처음 보는 흔적이 의심스러울 때마다 나혜는 엄마를 다그쳤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혹시 아빠가 다녀간 것 아니냐고. 그때마다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그저 넘어졌을 뿐이다, 한약이나 지어먹게 돈이나 좀 달라는 애매한 말로 곤란한 문답을 끝내기 일쑤였다.

끊어진 고무줄도 다시 묶어 쓰는 엄마가 새삼 무슨 돈이 필요하며 어떤 한약을 지어먹는단 말인가? 엄마의 궁색한 변명과 가욋돈의 요구가 늘 의심스러웠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다만, 잊을 만하면 다시 시작되는 그 문답이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중에 그날 아침, 결국 그 일이 터진 것이다. 하필이면 오빠가 지방 현장으로 출장 공사를 떠난 다음날이었다.


오후에 있을 면접 준비로 아침부터 잔뜩 신이 났던 나혜는 이른 아침의 뜬금없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설마 오빠가 벌써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인가?

“누구세요? 오빠야?”

묻지 않았어야 했다. 문을 열어 주지 말았어야 했다. 하긴, 묻지 않고 열어 주지 않아도 그 일은 일어났을 것이다. 열린 문 사이로 고약한 술 냄새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사내가 한 손에 각목을 들고 있었다. 나혜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한껏 공중으로 치켜든 몽둥이, 그 끝을 우악스럽게 틀어쥔 사내의 손, 그 끝에 응당 있어야 할 손가락 두 개의 부재不在, 나혜는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오빠의 부재不在와 저 사내의 손가락 부재不在가 서로 맞닿아 있음을. 그때, 각목이 허공을 갈랐다. 퍽 소리가 났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찰나의 통증과 함께, 잠시 후 비릿하고 찝찝한 것이 뺨을 타고 내렸다. 그것이 입술에 닿을 때쯤, 찢어지는 엄마의 비명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실내가 들여다보이는 창 밖에 서서 담배 두 개를 연거푸 피웠다.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나 나혜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릴까 봐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손을 씻고 입을 헹군 다음, 얼른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조심스러웠다.

“나혜 씨, 미안한데 모자 한 번만…”

아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각목’이란 말 때문이었다. 분명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나혜가 잠시 주저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주위의 눈치를 슬쩍 보는 것 같더니 그녀는 천천히 양손으로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모자를, 다른 손으로는 마스크를 내렸다.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알던 나혜의 얼굴이 결코 아니었다. 나혜가 면접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유를 그제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씨.. 그만, 그만!”

욕이 튀어나왔다. 숫자가 앞장을 섰다. 오십이 넘으면 내 감정쯤은 스스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제멋대로 내 상상에 그쳤지만, 그녀의 얼굴에 남은 증거는 내 눈에 고스란히 박혔다. 어떻게 아비라는 인간이 딸자식의 얼굴을 저렇게… 그러나 얼굴도 모르는 인간을 비난하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어나요, 나혜 씨. 빨리 갑시다.”

모자와 후드를 다시 챙겨 쓰던 나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이쌤, 어디를, 어디를 가요?”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또다시 옆 자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커피에서는 여전히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커피숍을 나오자마자 전화기의 번호부터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저쪽에서 형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김 원장. 나야. 토요일이니까 지금 병원에 있지? 곧 도착할 거야. 문 닫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한쪽 팔을 내게 빼앗긴 나혜가 허우적거리며 끌려왔다. 저항의 의지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차라리 고마웠다.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차의 경적이 귓고함을 쳤다. 아직은 빨간 불이었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바닥에 심하게 끌려 다닌 것 같은데?”

나혜의 얼굴에 난 상처를 꼼꼼히 들여다보던 김 원장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유를 아느냐는 눈짓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래, 어떨 것 같애? 일주일 정도면 나을 수 있을까?”

“일주일요? 음, 다행히 뼈는 상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일단 치료부터 시작해 보죠.”


고교 이년 후배인 김 원장은 서면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서로 몰랐지만 십여 년 전 동창회 모임이 활기를 띠던 해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고, 이후로는 가끔씩 만나 소주잔을 기울일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나혜가 마스크를 내리던 순간, 김 원장에게 데려와 우선 치료부터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김 원장, 나, 잠시 볼 일 보고 돌아올 테니까 치료 끝나도 이 친구 보내지 말고, 좀 잡고 있어. 알겠지?”

김 원장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과장되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두툼한 턱살이 흔들렸다. 손 모양이나 턱살이나 꼭 부처님 같았다.


운치 있는 겨울 바다가 눈앞에 훤히 펼쳐져 있지만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내 마음이 불편한 자리였다. 선배는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바다만 바라보며 내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호준이 형, 면접 기회는 다시 한번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자격이 안 되는 애를 억지로 합격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설명했잖아요.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아비라는 미친 인간이 딸 얼굴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일주일만,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치료가 끝나면 즉시 면접 볼 수 있습니다.”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로비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내가 찾아온 이유를 확인한 순간부터 선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여전히 창 밖에다 눈길을 고정한 선배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왔었어야지. 사정없는 사람이 어딨어? 면접에 불참했다는 것 자체가 자격이 안 되는 거야. 아무나 데려다 쓰는 동네 모텔도 아니고, 전무님 일정을 내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형,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내가 형한테 이런 부탁한 적이 있어요?”

선배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잔뜩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 말 잘했다. 부탁이라곤 한 번도 한 적 없는 녀석이, 걔한테는 왜 그래? 내가 말했지? 근본 없는 애, 이유 없이 도와주지 말라고.”

"......"

“네가 그러다가 남한테 당한 것이 한두 번이야? 너 등에 칼 꽂혔을 때도 그 일 있기 직전에 내가 뭐랬어? 이유 없이 남 도와줄 필요 없다고, 그러다가 그 인간들 마음 변하면 너만 다친다고. 그랬어, 안 그랬어?”


맞는 말이었다. 넉넉한 웃음이 전부였던 호준 형이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이만큼 설득했는데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슬쩍 시계를 보았다. 나혜가 얼추 치료를 마쳤을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요 형. 이제부터 따로 연락드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이만치 걸어와서 슬쩍 돌아보았지만 선배는 여전히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택시가 경적을 살짝 울렸다. 빨리 타라는 신호였다.


[3부에 계속됩니다]




* '나혜'는 본명이 아님을 일러둡니다. 양해 바랍니다.

* Image by TambiraPhotography from Pixabay



진우가 추천하는 1월의 작가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