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라불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Jun 21. 2022

슬픔의 기록 (2)

친구의 사고


   서둘러 나가야 했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깼는지 엄마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열한 시가 다 되었는데 이 늦은 시각에 어딜 가려고? 급한 게 아니면 내일 만나지 그러냐?”

   적당히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명수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래서 빨리 서울에 가야 된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명수는 엄마에게도 또 하나의 자식이었다. 명수 어머니를 대신해서 엄마는 아홉 살 명수를 당신의 자식처럼 씻기고, 먹이고, 재웠다. 제 힘으로 돈을 벌게 된 이후, 명수 역시 우리 부모님의 생신과 명절을 그냥 지나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서울 생활을 하기 위해 부산을 떠났던 97년 이후에도 그것은 변함없었다.

   “그냥…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얼른 주무세요.”


  서울로 가는 교통편을 재빨리 검색했다. 아쉽게도 마지막 열차가 이미 떠난 시각이었다. 차라리 직접 운전을 할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서두르는 마음이 과속過速을 부를 것은 뻔한 일이었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병철이, 현광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나없이 함께 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코로나 오미크론 시국時局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을 하고 나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심야 우등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뒷자리의 남자는 드르렁 코 고는 소리를 냈다.

   별일이야 있겠니, 금방 정신을 차릴 거야. 찬규를 비롯,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들은 앞다투어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창 밖으로는 때아닌 봄비마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명수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아홉 살이던 1979년의 가을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에 명수는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왔다. 얼굴은 까무잡잡했고, 키는 나보다 한 뼘 이상 작았다. 손을 들어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경우도 좀처럼 없었고, 쉬는 시간이면 늘 혼자 계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존재감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대수롭지 않은 녀석에게 나는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 문방구 한편에 펼쳐진 좌판에서 어묵과 떡볶이를 사 먹던 참이었다. 줄곧 뒤통수가 따끔거려 천천히 돌아보았더니 거기에 명수가 서 있었다.

   명수는 내 얼굴과 내 손에 들린 떡볶이 접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순간에는 어린 내 눈에도 그런 명수가 꽤나 불쌍하게 보였던 것 같다.

   “이거, 묵고 싶나?”

   명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온나. 같이 묵자.”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선뜻 내밀었다. 명수는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것을 냉큼 받아 들더니 떡 하나를 야무지게 꽂아 들었다. 입을 오물거리며 떡볶이를 먹는 명수를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맛있제?”

   내가 물었다. 한참 만에 명수가 고개를 들었다. 벌건 양념이 잔뜩 묻은 입꼬리가 시익 올라갔다. 그러더니 녀석이 갑자기 내 앞으로 손을 쭉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시늉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나는, 강명수다.”

   꽤나 당황스러웠다. 명수는 내 손을 잡자마자 아래위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면서 녀석은 하하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명수는 떡볶이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책가방의 지퍼가 열려 있어서, 그것을 말해주려고 내 뒤에 줄곧 서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다.

   

   명수네는 학교 담장이 끝나는 골목 들머리에 살았다. 방 하나, 부엌 하나, 화장실이 전부인 자그마한 슬레이트 집이었다.

   아래로 명애, 명옥, 두 여동생이 있고, 엄마는 남포동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명수 집에 놀러 가면 손바닥만큼 좁은 마당 빨래 줄에는 배를 쫙 가른 생선들이 걸려 있었고, 방 안에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났다. 명수는 그것을 부끄러워할 때가 많았지만 나는 조금도 싫지 않았다.

   명수의 아버지는 오래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고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명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내일 당장이라도 아버지가 돌아오면 용돈을 많이 받아 내 배가 터질 때까지 떡볶이를 사 주겠다고 했다.

   시장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명수의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고맙다,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생선 두어 마리를 내 손에 들려 보내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엄마를 직접 만나, 내가 보기엔 멀쩡한 것 같은데, 시장에서 팔다 남은 거라면서 극구 거절하는 엄마의 손에 고등어나 갈치 따위를 우격다짐 쥐어 주고는 어두운 밤길을 재촉하곤 했다. 명수 어머니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에는 엄마가 명수 집으로 가서 삼 남매의 저녁을 챙겼고 어쩌다가 명수, 명애, 명옥이 모두를 우리 집으로 불러 차례로 씻기고 저녁밥을 먹일 때도 있었다. 우리 엄마와 명수 어머니는 곧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명수와 나는 그렇게 사십여 년을 함께 보냈다. 짓궂은 장난에는 항상 명수가 있었고, 나름 치열했던 사춘기의 방황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삶의 궤적이 달라서 가끔은 길이 어긋날 때도 있었지만 그 길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고, 서로의 옆모습을 보면서 나란히 걸을 때도 많았다.

   

   두 딸과 사위들, 그리고 아들의 극진한 봉양을 받는 지금도 명수의 어머니는 부산에서 보냈던 당신의 고단했던 시절들을 가끔 그리워하신다.

   “자갈치는 그대로제? 우리 살던 동네는 많이 바꼈제? 우리 형님은, 너거 아버지는 잘 계시제?”

   “그럼요,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다음 주에 부산 한 번 오세요. 저희 어머니도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제가 모시러 나갈게요.”

   “아이고, 진우야. 나는 인자 늙어서 기차도 버스도 못 탄다. 멀미가 심해서. 그라고 우리 명수가 빨리 장가를 가야 내가 당당하게 며느리 앞장 세워서 부산을 갈 수 있제, 안 그렇나?”

   “그 녀석이 연애는 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만 고르고 빨리 결정하라고 제가 혼낼게요, 어머니.”

   “오야, 제발 그리 좀 해라. 니 말도 안 들으면, 좀 두들겨 패라.”


   오십 넘은 아들의 연애를 염려하며 농담을 주고 받던 그 대화가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명수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의식이 없다는 것을 어머니는 혹시 알고 계실까? 공연한 걱정이 앞섰다.

   버스가 서울에 들어섰다. 차 안에서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병원까지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게는 십 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주위는 어두웠다. 밤새 내린 비에 땅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은 멀었다. 입춘이 지났지만 서울의 새벽은 여전히 추웠다. 그러나 한기寒氣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미크론 환자 급증으로 건물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병원 건물 입구에서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다음, 명애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잠시 후, 출입을 통제하는 방역 담당자의 뒤로 자동문이 열렸다. 명애의 눈매다 싶은 얼굴이 얼핏 보였다. 누군가를 부축했는지 명애의 걸음걸이가 느렸다. 마스크를 했지만 나는 그분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명수의 어머니였다.

   “아,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이번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계속]



* Image by Alina Vladislavovna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의 기록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