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도 아닌 전라남도, 그것도 구례 화엄사의 절 마당에서 나를 부르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 짧은 동안에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를 알아보는 이가 명수나 상현 형이었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바람도 살짝 스쳤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민우가 서 있었다.
“어, 민우 씨?”
“맞네, 제이쌤 맞네. 와아, 제이쌤.”
민우가 와락 달려들어 나를 껴안았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민우는 내가 교육원에서 가르친 호텔리어 취업 과정의 첫 기수, 즉 1기 학생이었다. 그는 종강과 함께 몇 군데의 유명 호텔에 합격을 했고, 최종적으로 제주도에 있는 특급 호텔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었다. 그것이 벌써 작년 시월 말이니 얼추 반년만에 다시 만나는 셈이었다.
민우를 겨우 떼어내자 아가씨라는 호칭은 아직 어울리지 않을,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그 옆에서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엉거주춤 인사를 받았다. 여자 친구, 세아라고 했다.
마침 주인 할머니는 동네 친구와 함께 절에서 점심을 먹겠다고 내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얻어먹기로 한 점심은 구례 농협에 저축해 두라는 농담을 들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절문을 빠져나왔다.
도토리 묵과 파전이 우리 앞에 놓일 때까지 민우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교육 기간 동안 있었던, 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여자 친구에게 풀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이 그저 좋았다. 얼음물이 뚝뚝 떨어지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어 내 잔을 채우면서 민우가 물었다.
“제이쌤, 여기는 진짜 어쩐 일이세요? 그리고 얼굴이 왜 그렇게 까맣게 탔어요?”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스윽 훑었다.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민우가 주전자를 내게 건넸다. 손이 제법 시렸다.
“첫 출근한 뒤로 이번에 처음 제주도를 벗어났어요. 월차 휴가는 여러 번 있었지만,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부산 올 생각 말고 무조건 돈 아끼라고. 세아가 없었다면 이번에도 역시 호텔에 그냥 있었을 거예요. 얘 고향이 순천이거든요.”
세아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여행 계획을 잡을 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어요. 부산에서 세아랑 다 같이 선생님 만나려고요. 그런데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고요.”
아, 전화기. 하동河東을 떠나기 전에 우체국에 들렀었다. 스마트폰을 소포 상자에 담아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보내 버렸다.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나 메시지에 일일이 답을 하기도 싫었고, 걷는 동안 꺼 두었다가 늦은 저녁에 하나하나 회신을 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디 있냐는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할 것이며, 그 이유를 묻는 말에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저 막연했다. 더구나 수시로 찾아오는 불면不眠의 밤, 소주 서너 잔의 기운으로 몇몇 지인들을 골라 공연한 신세 한탄을 하는, 꼴 사나운 주사酒邪 따위는 정말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걱정 말라는 형식적인 메모도 상자 안에 함께 넣었다.
“교육원에 전화를 했더니 강의도 그만두셨다 하더라고요. 그럼 이제 호텔 일만 하시려나 싶었어요.”
“호텔은……”
“세아야, 우리 제이쌤은 정말 대단한 분이야. 선생님이 가르쳐서 취업시킨 호텔리어가 벌써 백 명이 넘어.”
민우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 때마다 세아는 존경 가득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대단한 분? 민우야, 절대 아니다. 대단은 무슨. 가장 소중한 내 사람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바보 같은,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란다.
두 번을 비우고 세 번째로 가득해진 주전자가 다시 상 위에 놓였을 때 적당한 취기醉氣를 느꼈다. 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내 앞에서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내겐 취기가 필요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던 참인데, 여기서 너희들을 만나게 되다니. 그런데 이상했다.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했어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술 한잔 하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나였다. 형식적인 인사치레는 절대 아니었다. 내 속내를 털어놓고 들어줄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하동에서 만난 젊은 경찰관처럼, 어떠한 가치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할 청자聽者가 필요했던 것일까? 구태여 막걸리 때문에, 취기 때문에라고는 하지 않겠다. 나는 ‘내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졌다.
결국 민우와 세아가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시작했고,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강의를 왜 그만두었는지, 부산을 떠나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것은 마치 교무실에 불려 가 체벌을 받기 직전, 면죄를 청하며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는 학생에 다름없었다. 스물다섯 살 학생에게 오십 넘은 선생이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한참 만에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세아가 휴지를 건네주었다.
“제이쌤, 참 나쁘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러게 말이다. 허허.”
쑥스러운 마음에 헛웃음이 따라 나왔다.
“제이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수업받을 때는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제이쌤께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건 세아도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겁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없어요.”
세아를 슬쩍 쳐다보더니 민우는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지금…… 교도소에 있어요. 죄명이 뭔 줄 아세요? 강간이에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삼 년 전,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여전히 거동을 못 하세요. 동생은 그때 겨우 중학생이었고요. 집에서 돈 벌 사람은 저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때, 스물도 안된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버티다 버티다 결국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과 같은 생각……”
나는 조용히 민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시도를 한 적도 있지만 뜻대로 안 되었어요. 할 수 없이 알바를 하며 근근이 살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그런 교육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국비로 지원되는 것이니까 손해 볼 것은 없겠다 싶었어요. 거기서 제이쌤을 만난 거예요. 처음엔 전혀 믿지 않았어요. 저 흰머리 꼰대가 또 뭐라고 나를 꼬드길까? 대부분이 그랬거든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건 다른 동기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내 잔을 채웠다. 차가움이 아까보다는 덜했다.
“너희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직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다. 너희를 알아주는 주군主君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제대로 한번 도전해 보자. 작은 성공이라 할지라도 직접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자.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자. 제이쌤, 제이쌤이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그러긴 했지. 그래도……”
“제이쌤은, 제 운명을 바꾸어 주셨어요. 제가 번 돈으로 엄마를 치료하고 동생에게 용돈을 주게 되었단 말이에요. 누가 물어보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 특급 호텔에 근무한다고. 저보다 열악한 환경의 동기들도 마찬가지, 실패했다고 자포자기한 모두가 선생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단 말이에요. 동기들끼리 단톡방에서 매일 그래요. 고작 스무 살 남짓이지만 자신들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인생인데, 하마터면 처음부터 포기하고 초라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 뻔했다, 제이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민우의 질책 아닌 질책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물론 친구분과 그 형님의 일은, 듣고 있는 저도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그게 제이쌤 잘못이 아니잖아요. 제가 보기엔 선생님의 행동은, 오버고 오지랖이고 감정 과잉이에요.”
“그, 그건…”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제이쌤은 더 많은 사람들, 저 같은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을 더 이끌어 주셔야죠.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런데 그런 극단적인 생각과,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인가요? 그게 당당한 건가요? 절대 아니잖아요, 제이쌤? 만일 그다음엔, 그다음엔 선생님의 사람들은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당장 저부터라도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지인들의 죽음을 견디다 못해 그 뒤를 따라간? 에이, 선생님, 그건 아니죠. 그건, 전혀 제이쌤답지 않아요.”
나다운 것? 그것이 뭘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뀐 화제와 다른 이야기로 자리는 풍성해졌지만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민우가 말했다.
“제이쌤, 세아도 호텔에서 일하고 싶어 해요. 가르쳐 주실 거죠? 조만간 부산에서 뵐 게요, 하하하.”
세아가 아까보다도 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곧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은 낯설다 싶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오버, 오지랖, 감정 과잉.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일곱에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에 입사했고, 잠시의 외도가 있었지만 마흔 살까지 회사 생활에 충실했다. 이듬해 내 손으로 회사를 창업했고 성공의 가도에서 지인들의 배신으로 좌절했다.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도전했고, 또 다른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비록 어마어마한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어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우연을 계기로 호텔을 운영하게 되었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비록 어리석다는 비아냥을 들을 지언정, 남을 이롭게 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버린 적은 없었다. 사람이라면,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상처를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치지 말고 우선은 도와야 한다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과연, 내가 이때까지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돌려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떠난 명수와 형은 과연 살아남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끄러움이 멈추지 않았다.
이틀 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는지 주인 할머니가 문 앞에서 헛기침으로 안부를 물었다.
“갱상도 아쟈씨, 여태 자는겨? 찬밥 비볐는디 한 숟갈 같이 헐랑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할머니는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주다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본시 사람이란 말이여, 걱정이란 것을 떠안고 태어난단 말이여. 긍께 너무 걱정하지 말어. 걱정한다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응께.”
“어머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아쟈씨 얼굴을 봉께 고로코롬 쓰여있구망. 나, 걱정 많소, 이렇게 말이여. 너무 그러지 말어. 다들 그렇게 사니께. 아,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당가? 간밤에 얼핏 듣기는 했는디, 아쟈씨헌티 소중헌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간 모양인갑제? 개안여, 개안타고.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사니께, 너무 걱정은 말어. 낸도 우리 영감 저 세상 보내던 날에는 고마 콱 따라죽어불까 싶더니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당가? 산 사람은 죽은 사람헌티 그저 고맙다 생각하며 열심히, 엉?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한당께. 먼저 죽은 사람도 그걸 바라지 않겄는감? 뭐, 죽어뿔면 워찌 되는지 몰겠지만서도, 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말만은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 다들 그렇게 산다. 잊히지 않아도 잊은 척, 잊어도 안 잊은 척, 그저 그런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다들 그렇게 산다.
설거지를 마치고 구례읍으로 나갔다. 피시방을 찾았다. 졸고 있던 사장이 반가운 척을 했다. 구석자리를 골랐다. 심호흡을 했다. 얼추 석 달 만에 메일함을 열어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백 통의 메일이 얼른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 많은 스팸을 걷어내고 나서 지인들이 보낸 편지를 하나씩 읽었다. 그 가운데에는 아내가 보낸 것이 있었다. 발신 일자는 내가 보낸 스마트폰을 받았을 무렵이었다. 아내의 평소 스타일대로 짧은 몇 구절이 전부였다.
너무 멀리까지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까지만
목소리 들리는곳까지만 가거라
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나태주 "부탁"
누가 볼까 봐 얼른 닦긴 했지만 눈물이 손가락 사이에 묻었다.
스승이라 부름을 허락해 주신 브런치 작가님의 메일도 있었다. 간략하게 근황을 적어 회신을 보냈다. 일이 터지던 때부터 내가 글을 멈춘 동안에도 계속해서 내 안부를 염려해 주셨음을 아내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늦은 연락이 그지없이 죄송할 뿐이었다.
피시방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보름을 앞둔 밤하늘의 달이 밝았다. 버스는 이미 끊겨버려서 그냥 걷기로 했다. 민박까지는 6 킬로미터. 한 시간 걸음이면 족할 거리였다. 하루에 삼십 킬로미터를 걸었던 기억은 이 정도 거리에는 웃음이 나도록 만들었다. 인생도 그러한 것일까? 계속 단련이 되면, 연습이 되면 웬만한 일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특별한 이유도 없었지만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편해졌다. 걷던 중에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가늠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이듯 혼잣말을 했다.
“명수야, 미안하다. 해남은, 다음에 가자. 가 봐야 별 것 없다.”
한사코 거절하는 할머니에게 억지를 부리다시피 조금 더 넉넉한 봉투를 쥐어 드렸다.
“다음엔 꼭 아내와 아들과 함께 올 게요, 어머니.”
아침에 찐 거라며 할머니가 감자 몇 알을 봉지에 담아서 내게 건넸다.
“구례 햇감자는 엄청 맛나부러. 목 맺힝께 버스 타기 전에 사이다 사서 같이 묵어, 잉? 그라고 너모 걱정 말어. 다 잘될 것이니께. 넘 욕심부리지 말고 그저 낮은 산으로 살어. 낮은 산으로 살면 말이여, 누구든 찾아올 수 있응께, 내 맘도 좋고, 남 맘도 좋은 벱이여. 늦겄네, 어여 싸게싸게 가더라고잉.”
할머니는 그러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왔다. 나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다가 끝내 돌아서서 치맛자락으로 코를 풀었다. 더 열심히 제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할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구례 종합 터미널에 도착해서 서울로 가는 표를 끊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가방을 뒤져 봉투를 꺼냈다. 보름이 넘도록 다른 물건들에 쓸려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미련 없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내가 썼지만 남들이 읽기 전에 내가 먼저 찢어버릴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우연한 동행이 억지로 찍어준 뒷모습. 저 길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나름의 일들로 인해 힘들었습니다. 여러분의 격려가 없었다면 돌아오는 것이 더욱 늦어질 뻔했습니다. 개인 메일로, 카카오톡으로 제 안부를 염려하고, 걱정하고, 물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뒤늦게 드립니다. 제때 못했던 답장은 이제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막연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저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이라도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발검무적 스승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