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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n 26. 2022

슬픔의 기록 (6)

죽음의 의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촌 누이와 불의의 사고로 유명幽明을 달리 한 친구, 그리고 힘든 현실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형에 이르기까지,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자연사自然死를 제외한 세 가지 유형의 죽음을 목도目睹하게 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빠지고 말았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입에 발린 헛소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내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더라면 적어도 한 사람의 생명만은 지킬 수 있었을 거라는 뒤늦은 자학과 자책이 모든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부모님을 애써 진정시켜드린 다음,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서랍 속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누었고 내친김에 옷장도 활짝 열어젖혔다. 어설픈 미련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웬만한 옷들은 모두 박스에 넣어서 아파트 마당에 내다 놓았다. 컴퓨터 안의 폴더를 열어서 오래전 쓰다 만 글들과 일상의 자잘한 기록들도 남김없이 전부 지워버렸다. 전화기 속의 웬만한 연락처 또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삭제했다. 초저녁 잠도 마다하고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에게는 그냥 기분 전환으로 짐 정리, 방 정리를 하는 거라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잠갔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벽에다 등을 기대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또 주르륵 흘렀다. 차라리 이렇게 울다가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옆으로 쓰러진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속에선 명수와 형이 번갈아 나타났다. 흔히 말하는 망자亡者의 작별 인사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좋았던 날의 풍경이었다. 골목을 뛰어다니며 장난질에 여념이 없는 명수와, 외국 손님과 기념사진을 찍어주면서 환하게 웃는 형의 모습이, 마치 잘 편집된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연속적으로 스쳤다. 꿈인 걸 알면서도 제발 깨지 않기를 바랐던 꿈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새벽에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이마를 짚어 보았다. 뜨거웠다. 여태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근육통이 곧 몰려왔다. 어딘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체념의 바탕에는 아주 몹쓸 가정假定이 깔렸음은 물론이다. 여러 가지 일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이었을까? 다음 날 나는 코로나 오미크론 확진 판정을 받고 말았다.


   마음만큼이나 몸이 힘든 시간들이 며칠 동안 다시 이어졌다. 일주일 간의 자가 격리가 겨우 끝난 뒤, 잠시 동안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회복과 재충전이 핑계였다. 별다른 만류는 없었지만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서는 내 등 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가장家長이다. 그 책임을 절대로 잊지 마라.”

   울컥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미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5월 하순下旬의 하늘은 쓸데없이 맑았다. 큰길로 나와 방향을 가늠했다. 목적지는 ‘해남海南’이었다. 명수는 어릴 때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땅끝 마을에 같이 가보자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간과 거리를 핑계 삼아 명수에게 면박을 주곤 했다.

   “그냥 땅끝이야. 가봤자 볼 것 하나도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었을까? 뒤늦은 후회가 새삼 밀려왔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명수의 사진을 찾았다. 작년 봄, 양재동 사무실에 놀러 왔을 때 찍은 것이었다. 바람을 잔뜩 넣은 볼 위에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브이자를 갖다 댄 명수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 소원 들어줄게, 명수야. 우리, 해남 가자.”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해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는 자전거 도로 기준으로 약 사백 킬로미터였다. 대략 보름 동안 그 길을 걸을 작정이었다. 총길이 1,470 킬로미터의 남파랑길 트래킹 코스가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었지만 남도길 구석구석을 밟으며 한갓지게 경치를 즐길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끝까지 걸어도 좋고, 중간에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더 좋고. 불운을 바라는 청승의 절정이었다.


   대략의 방향만 가늠한 채 뒤에서 앞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결심은 단호했지만 준비물은 그러지 못했다. 첫날,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등산용품 점에 들러 햇빛을 가려줄 모자를 샀고 둘째 날, 집에서 신고 나온 운동화 대신 트래킹화를 장만했다. 스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셋째 날, 국도변 식당에서 도보 순례객들과 동석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길은 위험하니 가능하면 자전거 길을 이용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러나, 일부러 트럭이 다니는 길만 골라서 걷고 있다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삼십 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걸음이 멈춘 근처에서 숙소를 구했다. 발바닥은 물집 투성이었고 얼굴과 팔은 햇빛에 그을려 따가웠다. 허리는 돌을 메단 것처럼 뻐근했고 종아리는 갈라지듯 아팠다.

   여기서 멈추고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하지만 사진 속 명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걷는 이유를 내게 되물었다. 사고를 당하는 순간 명수가 받았을 고통과, 지면地面에 추락할 때 형이 느꼈을 아픔, 사촌 누이가 평생 짊어졌을 극한의 외로움, 그것들의 백분의 일이라도 과연 내가 헤아릴 수 있을까? 더 힘들고 더 아파야 한다.

   어떤 때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조차 미안했다. 친구와 형이 죽었는데, 그래도 저는 산 입이라고 꾸역꾸역 밥을 처넣다니. 자학은 때론 감정 과잉을 넘어 나 자신에게 뜬금없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절대 잊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잠들기 전 기도와 새벽 기도였다. 나의 하루의 시작과 끝은 오롯이 먼저 떠난 사람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닷새째부터는 걷는 것이 꽤 익숙해졌다. 물론 순례객들의 조언대로 자전거 길을 따라 걸었기 때문인 이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굉음을 내며 트럭이 질주하는 국도변은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응원을 하고 곁에선 바람이 동행했다. 디디는 발에 명수가 떠올랐고, 떼는 발에 형이 묻어났다. 어쩌다 감정이 북받치면 길가에 주저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명수야, 미안해. 형, 미안해.




   집을 떠난 지 열흘, 전체 경로의 꼭 절반인 하동河東 근처를 지날 때였다. 다리 위에 멈춰 서서 그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집 앞 도랑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걸터앉아 명수와 나는 돌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우리, 어른 되어도 친하게 지내자.”

   “싫다. 나는 어른 되면 빨리 장가가서 내 색시랑 살 거다.”

   

   흘러간 물은 추억을 삼키고, 몰아쳐오는 물은 새로운 기억을 불렀다. 하나씩 곱씹다가 또다시 솟아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리 난간을 잡고 한참 울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보았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처럼 앳되어 보이는 젊은 경찰이 서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라고 했다. 다리 위에서 어떤 남자가 울고 있어요. 혹시나… 신분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그에게 그동안의 사연을 짧게 말해 주었다. 경찰관이 신분증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로 돌아가려다 말고 대뜸 나를 향해 그랬다.

   “선생님,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다가와 자기의 명함을 건네주면서, 혹시라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언제든 전화를 달라고 했다. 관할 구역이 아니라도 전혀 상관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경찰차가 저 멀리 가버린 다음에도 나는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남에 도착하면 나는 과연 무엇을 실행할 작정이었나? 좀 더 솔직해지자.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떠올랐다. 동창 규석이는 불침번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져버린 사고로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었고, 내 짝이었던 우영이는 입사 후 첫 휴가 때 바닷가에서 심장 마비로 죽었다. 마찬가지로 고교 절친 상규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외근 나가는 택시 안에서 세상을 등졌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있으며 아깝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 모두의 죽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일까?


   전날과 다름없이 몸은 부서질 듯 피곤했지만 밤이 늦도록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해남으로 가려던 원래 계획을 잠시 미루고 구례로 방향을 틀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머리 위에 걸린 갈림길 이정표를 보는 순간, 화엄사華嚴寺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동에서 구례는 부지런한 하루 걸음으로 충분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황전리 입구에 도착했다. 황전리는 화엄사에서는 불과 2 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생각보다 민박이 많았다. 서너 군데를 돌아본 다음,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는 곳에 묵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배낭 속에 묵혀 두었던 오랜 빨래를 마친 뒤에 어제보다는 훨씬 편한 차림으로 화엄사를 향했다.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대웅전 구석에서 백팔배를 올렸다. 사촌 누이와 명수와 상현 형을 위해서, 그리고 형이 떠나던 때를 즈음해서 대장암 투병 끝에 별세하신, 나의 초등학교 일 학년 담임 강영애 선생님을 위해서도 향을 다시 피웠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법당 마루에 툭툭 찍혔다.

   반나절을 절에서 보냈고 오후는 동네 산책을 했다. 잠자리는 더없이 편했지만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라 전날과 마찬가지로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구례에서 사흘째 아침을 맞았다. 식사를 하고 화엄사로 가려는데 뜻밖에 주인 할머니가 따라나섰다. 주인 할머니가 손님인 내게 거리를 두지 않는 것 같아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대접하겠다 했더니 아이처럼 좋아했다.


   화엄사로 향하는 길목뿐만 아니라 절집 여기저기에는 눈에 띄게 사람들이 많았다. 사흘 연휴가 시작되는 유월의 첫 토요일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주인 할머니가 각황전覺皇殿에서 독경讀經을 하는 동안 혼자서 절 마당을 걸었다. 4월에 왔더라면 화엄사가 자랑하는 홍매화를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짝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다니는 길을 실수로 막았나 싶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참인데 뜬금없이 이런 말이 먼저 들려왔다.


   “혹시… 제이쌤, 제이쌤 아니세요?”


[계속]



* Image by Raphael Stäg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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