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동생처럼 아끼던 후배와, 둘도 없는 친구의 협잡挾雜으로 인해 내 손으로 만든 회사를 눈앞에서 송두리째 빼앗기는,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난 그 이듬해였다.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후폭풍이 컸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실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는 현실로부터 도망쳤다.
극단적인 생각과 돌발 행동을 염려했던 선배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와 달랬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공허했다. 결국 모임의 좌장인 영진 선배와 호영 선배가, 스크린 골프장을 하나 만들어 줄 테니 그곳에서 와신상담하며 천천히 재기를 준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곳이 경북 상주였다. 몇 번의 거절 끝에 마지못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 머물게 된 낯선 곳이었지만 서너 달이 지나자 겉돌던 마음도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그즈음에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형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나던 날, 소주 한 병이 채 비워지기 전에 고故 박광정 배우를 쏙 빼닮은 형이 내게 말했다.
“진우 씨, 믿고 맡길 테니 내 호텔을 운영해 주세요.”
“네? 호텔요?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위험한 요청을 하시는지…”
형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면서 잔을 들었다. 소주 한 잔이 치사량致死量인 그였다.
밤새 고민을 했다. 자문自問했다. 일어서기 위해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애써 의미를 부여했다. 호텔이 내 고향, 부산에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나를 위해서 다시 한번 도전하자. 선배들과 상의를 끝낸 며칠 후, 짐을 챙겨 부산으로 향했다.
호텔 지하에 작은 방을 만들고 숙소로 삼았다. 쪽잠을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24시간 내내 호텔 일에 매달렸다. 경험치는 전무했으나 적잖은 외국 출장 경험, 타고난 성격, 어설픈 외국어 실력이 나름 도움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호텔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좋은 위치에 깨끗하고 편안한 시설, 그리고 도대체 잠을 자지 않는 고객 지상주의의 매니저까지. 워커홀릭 매니저 제이 Jay, 그게 나였다.
호텔을 다녀간 외국 여행객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후기를 올렸다. 부산에 가면 반드시 해야 할 세 가지. 첫째, 기장機張에 가서 대게를 먹을 것. 둘째, 국제 시장에 가서 면綿 이불을 살 것. 셋째, Jay가 있는 남포동 호텔에 묵을 것.
소문은 손님의 증가로, 그것은 또다시 매출로, 결국 형의 웃음으로 확인되었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3년을 보내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친구와 함께 양재동에 사무실을 내고 정부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작년 여름에 우연히도 부산에 있는 모某 교육원으로부터 호텔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산으로 내려온 며칠 후, 오랜만에 형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중간중간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다시 만난 형의 상태는 전과는 많이 달랐고, 대체적으로 썩 좋지 않았다. 형수와는 여타의 이유로 이혼을 했고, 건강이 나빠져 일주일에 세 번, 근처 병원에서 투석透析을 받는다고 했다. 당뇨는 기본이었다. 그리고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우울증과 정신 장애마저 겪는 눈치였다. 형이 묵는 원룸 식탁 위에 수북했던 약봉지가 그런 판단을 가능하게 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을 것이다. 부산 변두리에 있는 작은 모텔을 전세로 얻은 것이 화의 근원이었다. 계약 바로 다음 달, 국내에서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 만만찮은 월세를 줘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원래 운영하던 호텔의 매출도 당연히 급감했다. 객실을 가득 채우며 ‘돈’이 되어 주던 외국인들의 발길이 원천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형의 수입이 반의 반 토막으로 되어 버렸음은 확인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형이 도와달라고 했다.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형이 처음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처럼, 나도 흔쾌히 형의 손을 잡았다.
바닥 매출을 찍어버린 호텔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손볼 것들이 많았다. 물론, 내가 달라붙는다고 하루아침에 호전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은 고민을 털어놓을 말 상대가 다시 생긴 것을 우선 기뻐하는 눈치였다. 형의 별명이 수다쟁이라는 것을 믿는 호텔 직원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얼추 일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형을 도왔다. 호텔은 점차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수의 사고로 한 달 가까운 시간을 호텔 업무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명수의 일 때문에 당분간 호텔 일에 신경을 못 쓸 것 같다고 말하던 그때, 무언가를 말하려던 형의 목소리가 새삼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형이 죽다니,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준현 씨. 사고예요? 혹시 교통사고?”
“그게 아니라, 오늘 아침에 박 사장님이 원룸 옥상에서…”
형의 죽음을 먼저 호텔로 알려온 것은 경찰이라고 했다. 숙소 뒤편의 화단에서 형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을 경비가 발견해서 신고를 했다는 설명이었다. 투신자살投身自殺. 전화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아내도 사태가 심상찮음을 느낀 것 같았다.
“퇴원 준비할까요?”
아내가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어쩌다 이런 일이. 형은 왜, 형은 왜? 형이 그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복잡한 절차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형의 장례가 진행되었다. 빈소는 대학병원에 마련되었다. 슬픔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형수가 엄청나게 미웠다. 그래도 남편이었잖아. 그리고, 자신들을 낳아준 아빠인데 형수와 마찬가지로 무덤덤한 두 딸의 모습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게 만들어다. 하지만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가족들만의 일이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짓느라 힘들었다. 형의 형제들이란 사람들도 그저 데먼데먼했다. 저런 차가운 이들과 가족 관계였다니, 형이 사는 동안 무척이나 외롭고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득달같이 달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라고 했다. 호텔이 매개가 되었으니 내 뜻과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불려 나가게 되었다. 형수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자기들끼리의 싸움과 잦은 말다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설왕설래 끝에 그들이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실제 호텔 운영에 내가 깊숙이 관여해 왔으니 나를 호텔 사장으로 지정할 것이며, 그에 맞는 보수와 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화가 났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다만, 형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겠다는 뜻에서 한 달 동안만 관리할 것이며, 그동안에 새로운 운영 책임자를 채용하면 정상적으로 문제없이 인수인계를 하고 업무를 끝내겠다고 말했다.
형은 창원의 추모 공원에 안치되었다. 묘를 쓰지 않고 뒷산에 뿌려진 내 사촌 누이와, 묘 없이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된 명수와는 달리, 형은 작지만 그래도 아담한 공간을 자신의 마지막 호텔로 삼았다. 유리 문이 봉인되기 전에 나는 만년필을 넣어 주었다. 함께 일하던 첫 해, 형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게 준 것이었다. 내 이름을 단 호텔을 짓게 되면 방명록에 첫 서명을 하라며 기분 좋은 웃음을 가득 실었던 만년필이었다.
사촌 누이도 떠났고, 명수와 형도 내 곁을 떠났다. 일상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던 그동안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만큼은 소홀할 수 없었다. 하루에 두 개의 강의, 여덟 시간의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웃겨야 하는 대목에선 웃겨야 했고, 장난을 칠 장면에선 어김없이 장난을 쳤다. 하지만 과목 자체가 호텔이었다. 호텔에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 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수의 추억도 꼬리를 물었다. 그럴 때면 버티기 힘들었다. 이유 없이, 아니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슬픔이 내 속에서 치솟을 때는, 내가 학생일 때 그렇게 싫어했던 ‘십 분간 자습’을 할 수 없이 시켜두고는 돌아서서 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종강과 함께 학생들이 취업에 역시 성공했다. 나는 더 이상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교육원에 통보했다. 그간의 사정을 대충 들었던 교육원 운영자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겠냐고, 잠시만 쉬고 강의를 재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반년 동안 이미 백 다섯 명의 학생을 호텔에 취업시켰으니 지금 대목에서 가장 기분 좋게 정리하겠다고 거짓 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그때를 즈음하여 호텔의 새 운영자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는 것도 별 탈 없이 끝났다.
사촌 누이, 명수, 그리고 형. 내 소중한 사람들이 한 달 반 남짓 되는 시간에 모두가 그렇게 떠났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눈물로 수습을 했었다. 억지로 버텼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다. 나도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남의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으나 떠남의 목적만큼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