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는 자기 배를 가진 선주船主였다. 장사 수완이 좋은 외할머니 덕에 그날 잡아온 물고기와 해산물들은 단 하루도 지체되지 않고 금방금방 팔려 나갔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끼니 걱정을 하며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음에도 외가外家의 창고엔 늘 쌀과 보리가 가득했고, 맷고기 굽는 냄새가 담장을 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대문간에는 곡식을 빌리려는 동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곤 했다. 보리 흉년에 고깃국이 웬 말이냐고 흉을 보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외할머니는 일부러 넉넉한 됫박을 준비해서 이웃의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끝까지 애썼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아쉬움이 미리부터 염려되었던 동네 사람들은 평소부터 외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큰외삼촌, 심지어 코흘리개 막내 손주에게까지 아양을 떨어가며 머리를 조아렸다. 명절이라 처가妻家를 찾아간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섰다. 당신들의 대代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수 형, 그러니까 외삼촌의 큰아들인 정수 형의 버릇까지 나쁘게 만들고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대처大處에 비하면 전혀 보잘것없지만 손바닥만 한 동네 안에서 나름 부자입네 거들먹거렸던 탓에, 대를 이을 장자長子인 정수 형의 건방진 일탈은 일찌감치 예견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당초 공부를 내팽개친 것은 당연지사였고, 창고의 쌀을 몰래 훔쳐다 돈으로 바꾼 다음, 몇 날 며칠을 진주며 부산으로 놀러 다니기도 다반사였다. 빈털터리로 돌아온 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삼촌은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맏아들은, 사내대장부는 오히려 그렇게 커야 한다며 형을 감싸고돌았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외삼촌 옆에서 엄마는 그저 아버지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유산을 물려받은 외삼촌은 그 돈을 양껏 불려보겠다며 고향의 논밭까지 한꺼번에 팔아 치운 다음, 뜬금없이 읍내에다 다방을 차리겠다고 했다. 억지로 공사를 떠안게 된 것은 아버지였다. 오빠를 도와 달라는 엄마의 호소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턱없이 모자라는 돈을 공사비라며 건네는 식사 자리에서 큰외삼촌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네 기술이 엄청 훌륭하구먼. 내 아들 정수를 부산으로 보낼 테니 자네가 알아서 그 기술을 가르치게.”
부탁이어야 마땅할 소리가 당연한 명령과 지시처럼 던져졌다. 나무를 다듬고 집을 짓는 목수와, 몸뚱이 하나가 밑천인 건설 노동자에게는 남다른 부지런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런데 세상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정수 형에게 그런 현장 일이 맞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염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외삼촌에게 물었다.
“형님, 그럼 정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있네. 사람을 때려서. 내일모레쯤 나올 테니 그때 부산에 같이 가면 될 걸세.”
얼마 후 형은 마지못해 짐을 챙겨서 부산으로 왔고, 아버지는 내게 방을 같이 쓰라고 했다. 그때까지 쌓아온 정情도 딱히 없었고 무엇보다도 형에게 배어 있는 담배 냄새가 고약했다. 게다가 말끝마다 달라붙는 욕설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세 한탄이 너무나도 듣기 싫었다. 당시 형의 나이 겨우 스물대여섯 남짓이었지만 중학생이었던 내게 있어 형의 저주는, 듣는 것만으로도 겁이 날 정도였다.
형이 수영복 차림의 여자 사진을 벽에다 덕지덕지 붙이던 다음 날, 엄마는 내 방을 형에게 내어주고 안방에서 공부하라고 했다. 나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작은 책상까지 함께 옮겼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래도 형은 아버지를 따라 공사 현장에 곧잘 다니는 듯했다. 아버지는 다른 인부들보다 약간의 돈을 더 얹어 주었다. 이제야 형이 마음을 잡았다며 엄마는 틈날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형의 개과천선은 착시錯視였고, 그 착시는 오래가지 않았다.
첫 수당을 받던 날, 형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지독한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걷잡을 수 없는 욕설도 빠뜨리지 않았다. 잠에서 깬 나는, 우리 가족이 저런 골칫덩어리를 떠안게 된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 스스로 물었다.
젊은 나이에는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겠지 하며 아버지는 애써 형을 두둔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치를 살피던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더니 형은 받은 돈 전부를 저녁 술값으로 써버렸다고 했다. 엄마의 한숨이 아주 길었다.
“이제부터 월급 받으면 용돈만 줄 테니까 나머지는 은행에 저축해 두자. 알겠제?”
그 일이 있은 며칠 뒤였다. 아버지가 집에서 동네 친구들과 식사를 하던 저녁 무렵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싶을 즈음에 갑자기 꽝 소리를 내며 대문이 활짝 열렸다. 누군가 대문을 걷어찬 것이었다. 다들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형이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것으로 보아 이미 취할 대로 취한 것 같았다. 손에는 몽둥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당에 선 채로 형은 아버지를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내 돈 내놔, 내 돈!”
아버지도, 엄마도, 마루에 앉았던 아버지의 친구들도, 방문 틈으로 바깥의 소란을 지켜보던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식사자리가 엉망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형은 그 길로 집을 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내 방을 되찾았고, 벽에 붙어있던 헐벗은 여자들의 사진을 떼어냈다. 형의 옷가지와 짐을 챙기면서 엄마는 연신 눈물을 찍어냈지만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외삼촌은 전화를 걸어, 대체 얼마나 고된 일을 시켰길래 정수가 집을 나가냐며 아버지를 몰아붙였다. 아버지는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외삼촌의 말에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일 년 즈음 지났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낯선 신발 몇 켤레가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도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뒤꿈치를 세우고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 학교 갔다 오는갑네?”
돌아보았다. 형이었다. 이런 젠장. 마지막으로 형이 떠나던 날의 순간들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그가 뱉었던 욕설도 기억이 났다. 인사를 받아야 할지, 자리를 피해야 할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임마, 오랜만에 보는데 형이 하나도 안 반갑나?”
전혀, 전혀 반갑지가 않아. 반가울 리가 없지. 그때 형의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주 앳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마침 엄마도 그 옆에 섰다.
“진우야, 인사해라. 네 형수다.”
형수라고? 그럼 이 여자가 형의?
“우리 아들이다. 인사해라.”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형수’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수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내가 순천順天 형수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녀를 순천 형수라고 부르는 것은, 아쉽게도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향이 전남 순천이라고 했던 것만 기억난다.
“고모부, 이제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새 사람이 되어 보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퇴근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형은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아버지, 안됩니다.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열일곱 살의 건방진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여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 한 번 속을 작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부엌이 딸린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이 형과 형수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형이 아버지를 따라 일을 나간 동안 딱히 갈 데가 없었던 순천 형수는 우리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 함께 야채를 다듬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서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나는 간식을 먹는 척, 식탁에 앉아 곁눈질로 형수를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자칫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깜짝 놀라서 빈 숟가락을 콧구멍에 들이대곤 했다.
“도련님.”
순천 형수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형수님.”
“그럼 뭐라고 불러요? 도련님이니까 도련님이지.”
엄마가 시장을 보러 가고 없을 때였다. 평소처럼 집에 와 있던 형수는 내 간식이라며 짜파게티를 끓였다. 형수는 짜파게티를 정말 잘 끓였다. 한 번도 어김없이 면은 퍼지고 국물이 흥건했던 엄마의 일상 실패작과는 달리, 형수는 포장지에 나와 있는 것과 똑같은 상태로 대충 아무 그릇이 아닌 심지어 예쁜 접시까지 챙겼다. 나는 순천 형수가 조리한 것보다 더 맛있는 짜장 라면을 여태 먹어본 적이 없다.
“도련님, 제가 몇 살인지 궁금하지요?”
사실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대답을 않고 있으니 형수가 먼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저, 올해 스물한 살이에요.”
스, 스물한 살? 나랑 겨우 네 살 차이? 이렇게 어린데 시집을 왔다고? 형수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 이었다. 자기는 부모가 없다고 했고, 일찍 고향을 떠나 공장을 다니다가 인천의 다방에서 일했다고 했다. 거기서 우연히 형을 만나 부산으로 온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순 없지만. 남해의 외삼촌, 그러니까 형의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고 왜 우리 집으로 왔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때 하필 엄마가 돌아왔다. 꼬들꼬들한 라면 가닥을 엄마에게 일부러 흔들어 보였다.
형수는 이후로도 자주 짜파게티를 끓여 주었다. 형수의 방문이 뜸할 때면 가끔씩 짜파게티 생각도 나고, 형수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엄마에게 형수의 근황을 묻지는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았어도 형수의 방문이 뜸했던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맞았다. 마음잡고 잘 사는가 싶더니 정수 형의 일탈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현장에서 일하던 도중에 사라지거나 아예 출근을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때마다 형수는 마치 무언가를 피해 도망친 사람처럼 늦은 밤,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곤 했다. 어김없이 형수의 눈 언저리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형수는 애써 눈을 가리며 이유를 숨기다가 결국엔 털어놓고 말았다.
“고모님, 정수 씨가 또 때려요.”
호남 사투리도 아닌, 서울 말도 아닌 순천 형수 특유의 억양이 말투 속에 녹아 있었다. 그것이 유난히도 슬프게 들렸다.
“술만 안 먹으면 괜찮아요. 평소에는 좋은 사람이에요.”
행여 또 있을지 모르는 구타를 염려한 엄마가 직접 따라가거나 형수 집까지 나를 동행하게 할 때가 있었다. 대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면 문이 왈칵 열리면서 형이 튀어나왔다. 욕설을 하는 형의 손에는 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뒤늦게 나를 본 형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애써 웃음을 짜냈다.
“어, 진우, 왔나? 이 사람이, 저녁 됐는데, 밥 안 주고 어딜… 갔던 거야? 산책 갔었어?”
이런 몹쓸 인간. 너는 형도 아니다. 속으로 차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았다. 어쩌면 오늘 밤, 내가 가고 나면 형수는 또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형수를 우리 집으로 다시 데려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형수는 눈짓으로 말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이제 괜찮다고.
“도련님,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혹시나 형이 또 형수를 때릴까 봐 담장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연이은 호출과 질책도 형의 폭력을 막을 순 없었고, 엄마의 호소 또한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 해 가을, 형이 또다시 집을 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형수의 배는 이미 남산만큼 불러 있었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결국 한 달을 기다린 끝에 경찰에 실종 신고까지 했지만 이후로 두 달이 넘도록 연락은 없었다.
형수는 형도 없이 우리 엄마가 지켜보는 옆에서 아기를 낳았다. 딸이었다. 출산 소식을 듣고 그제야 남해에서 외삼촌 내외가 왔다. 그러나 외삼촌은 ‘근본도 없는 여자’를 며느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아버지와 엄마가 간절하게 외삼촌을 설득하려 했지만, 정수 형이 없는 지금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수는커녕 태어난 아기에게조차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만일 정수 형이 돌아오면 그때는 한 번쯤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억지만 남겨두고 두 사람은 그 밤에 곧장 남해로 돌아갔다.
그날 밤 형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엄마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형수를 다독이며 엄마가 그랬다.
“그냥 우리를 시부모라고 생각해라, 진희 애미야.”
진희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 주었다.
학력고사를 눈앞에 두었던 89년의 겨울 무렵, 결국 형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인천의 어느 부둣가에서 술에 취한 채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져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기절한 형수를 엄마가 간호하던 중에 또다시 외삼촌과 외숙모가 들이닥쳤다. 애먼 아들을 죽였으니 책임지라며 삼촌은 형수의 뺨을 올려붙이고 욕을 퍼부었다. 경찰관이 제지를 했어도 소란은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욕하는 모습을 보았다. 당신들은 사람도 아니다. 불쌍한 진희 애미는 차라리 우리가 보살필 것이니 앞으로 절대 연락하지 마라. 의절義絶이다. 엄마는 그 옆에서 또 울고 있었다.
형수는 혼자서 꿋꿋하게 잘 지냈다. 진희도 제 엄마를 닮아 제법 예쁘게 자랐다. 첫 휴가를 나오니 형수가 집에 와 있었다. 주문도 하지 않은 짜파게티가 저절로 요리되었다. 형수의 짜파게티는 여전히, 변함없이 맛있었다. 그런데 눈에 띄게 핼쑥한 형수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식당 일을 한다더니 그게 힘들어서 그런가, 혼자 추측만 할 뿐 굳이 묻지는 않았다. 말을 야무지게 곧잘 하는 귀여운 진희가 걱정을 덮었다.
상병 휴가를 나왔을 때 엄마와 함께 형수를 만나러 갔다. 부곡동에 있는 요양 병원이었다. 형수는 암 투병 중이라고 했다. 스물일곱이라는, 한참 푸르를 나이에 형수는 하릴없이 사그라드는 생명줄을 부여잡으며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유치원 가방을 옆에 두고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진희가 나를 보며 웃었다.
“진우 삼촌, 군인 삼촌!”
연신 눈물을 훔치는 엄마 옆에서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형수가 힘겨운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
도, 련, 님.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나는 형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온기溫氣라고는 하나도 없이 뼈가 그대로 만져지는 앙상한 손이었다.
“저는 곧 순천으로 갈 것 같아요.”
그저 고향일 뿐, 순천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지 않냐고 물었다. 형수는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끝까지 우리 가족과 함께 있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들어왔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94년 5월에 전역을 했다. 며칠이 지나 형수의 근황을 물었더니 아버지는 말없이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형수가 보낸 편지라고 했다.
요양 병원을 나와 진희와 함께 순천에서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좋은 인연들을 만나 그분들이 진희를 잘 돌봐준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고모부님, 고모님, 진우 도련님에게 너무나 신세를 많이 졌고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자국 자국마다 형수의 눈물이 비치는 것 같았다. 봉투의 소인消印을 보니 이미 육 개월이나 지난 편지였다. 나는 편지지를 잘 접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형수는 96년 1월에 소천所天했다.
아침 기도를 마쳤을 때 뜬금없이 기차를 타고 싶었다. 고속 열차가 아닌, 옛날식 완행열차 말이다. 부전역釜田驛에서 출발,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을 검색하니 딱 적당한 곳이 하필이면 순천이었다.
형수와의 추억 어쩌고저쩌고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느린 기차를 타고 싶었고, 좀 더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당장 퇴역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두 칸짜리 무궁화 호를 타고 두어 시간 남짓 걸려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이 종착지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서울에서 부산 오듯 가방을 메고 무덤덤하게 내렸다.
난생처음 와 보는 곳이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것처럼 낯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역을 빠져나와 이만큼 걷다가 한참만에 뒤를 돌아보았다. 광장 건너편으로 우뚝 서 있는 간판과, 하얀 건물에 붙은 역사명이 눈에 들어왔다. 한자로 표기된 순천順天을 보는 순간, 순천順天이라는 말의 뜻이 새삼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저 끄트머리에서 형수와의 오래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