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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27. 2022

제목 유감

긴 제목 전성시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삼 남매의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싶으면 엄마는 돈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1970년대 후반, 느닷없이 불어닥친 독서 열풍으로 동네 골목에는 책을 팔러 다니는 외판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의 뛰어난 상술 때문인지 엄마의 현명한 판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집 책장에도 오십 권, 백권 단위의 전집이 시나브로 들어차게 되었다. 금성 출판사 세계 위인 전집, 삼성당 세계 아동문학 전집 등등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만큼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 사랑받은 것은 단연코 ‘계몽사 문고 100권’이었다.


   다독多讀이 책 읽기의 으뜸 원칙이었던 여섯 살 터울의 누나는 무조건 1권부터 읽을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기꺼이 꿀밤을 맞아가면서도 굳이 2권을 펼쳐 들었다. 대충 그린 듯한 표지 그림은 차치하고라도 1권은 그 제목부터가 너무나 재미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흰 고래 모비 딕’? 이게 뭐야? 당연히 고래 이야기 아니겠어? 반면 2권, ‘황금의 파라오’. 캬아, 이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그 제목만 봐도 심장이 쫄깃쫄깃해지지 않아? 지금 생각해보면 고래와 파라오 사이에 어떤 확실한 차이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거나 한 권을 기분 좋게 끝낸 다음, 도서 목록이 빽빽하게 적힌 페이지를 활짝 펼치고는 위에서부터 손가락으로 주욱 훑어 내려가다가 내 시선과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 제목을 발견하게 되면, 그렇지, 바로 이거지 하며 냉큼 책장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멋진 제목은 곧 좋은 책. 멋진 제목에 집착하는 지금의 버릇은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백치 아다다, 감자, 배따라기, 붉은 산, 광염 소나타, 광화사, 동백꽃, 봄봄, 소낙비,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땡볕,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뽕, 금수회의록, 표본실의 청개구리, 어린 영혼, 날개, 권태, 혈의 누, 메밀꽃 필 무렵, 분녀, 산, 레디메이드 인생, 두 순정, 탈출기, 토혈,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빈처, 무진기행, 우상의 눈물, 필론의 돼지, 한계령, 타인의 방, 새하곡...


   제목은 글의 시작이며 책의 시작과 끝이다. 제목이란, 말 그대로 작품이나 강연, 보고 따위에서, 그것을 대표하거나 내용을 보이기 위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제목과 글이, 제목과 책이 따로 놀 수는 없다. 뜬금없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문제겠지만 제목이 전부여서도 안된다. 제목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압축하여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상징들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첫 변화는 가요, 노래 제목에서부터였다.


   굳이 나이 인증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아는 노래의 제목은 대개가 짧다. 비련, 인연, 영원, 길어봤자 열 글자를 넘지 않았다. 디제이 디오씨의 ‘그녀의 속눈썹은 길다’가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친구들끼리 그랬다. 제목이 그냥 ‘속눈썹’이면 더 멋졌을 텐데 왜 이렇게 길게 만든 걸까?

   그런데 최근 등장하는 노래들의 제목에 비하면 그것은 애교에 불과한 수준이다. 요즘 노래의 제목들은, 이게 제목인지 첫 노랫말의 구절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긴 것들이 많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장범준), 그대를 사랑하는 열 가지 이유(디에이드), 어떻게 사람이 늘 사랑스러울 수 있어(스텔라 장),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잔나비), 우리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기 위해서(안녕하신가영),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망할 너의 친구들의 아이디어 같아(기리보이)...


   긴 제목의 유행은 가요에만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다모, 모래시계가 전부였고 ‘발리에서 생긴 일’조차도 제목이 길다며 ‘발리’로 줄여 불렀는데 말이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우리 좀 어려운 사이인가요,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소설 분야, 특히나 웹소설은 더욱 심하다. 어떤 것이 있냐 하면… 그냥 넘어가자. 제목을 옮겨 쓰는 것만으로도 A4 한 장은 거뜬하게 넘어갈 것 같다. 한두 개만 언급하자면...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사실 그들은 오직 그녀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의 가요, 드라마, 소설들의 제목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략의 가설들을 추려서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대중들의 눈에 띄고 싶어서

두 번째, 참을성 없는 소비자들 때문에 제목만으로 전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세 번째, 기존에 등장했던 것들과 마치 다른 것처럼 착시를 주기 위해서


   길어지는 제목들의 경향은 브런치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최근에 발행되는 글, 특히나 브런치의 알고리즘 때문에 모바일 어플에서 우선적으로 보이는 글의 제목들 역시, 하나같이 ‘길다’. 상징이나 함축적인 낱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직설적인 서술형이며 제목을 통해 글의 내용을 일찌감치 말해 버린다. 이 제목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만들지 않고, 아, 대충 이런 글이겠구나 가늠하게 한다. 처음부터 맥 빠지는 순간이다. 미리 알고 나중에 읽게 되는 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브런치의 글들은 글의 입구에서부터 내용을 두 손에 안고 제목이 마중 나와 있는 것이다.


   브런치 글의 제목이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세 가지 이유 외에 굳이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혹시 이런 건 아닐까?


네 번째, 제목을 지을 때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제목을 제목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용의 요약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이야기를 제목을 통해 미리 말해줘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왜냐? 자신의 글 솜씨에 대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은유와 함축을 동원해서 제목을 지었다가 혹시라도 읽는 이들로부터 외면받거나, 읽지 않고 지나쳐 버리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만일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을 브런치 글쓴이들이 썼다면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내가 아사코를 세 번 만난 것을 후회하는 이유’. 황순원 선생의 명작 ‘소나기’는 이렇게 개명될 것 같다. ‘죽기 전 입었던 옷에 진심입니다’.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는, 어쩌면 ‘열두 척 배로 적을 물리치는 그만의 비법’...


   물론 제목도 글의 일부이고, 어떤 제목을 짓는가 역시 글쓴이의 고유 권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옳다, 저런 제목이 나쁘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제목만 봐도 내용을 다 읽어버린 것 같은 그런 제목이라면, 글을 발행하기 전에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내용에 대한 궁금함이 없다는 말은, 곧 글이 재미없다는 뜻이다. 제목에서 이미 내용의 대략을 말해버렸는데 글이, 독서가 재미있을 리 없다. 한편으로 엉뚱한 제목 짓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어쩌다 솔깃해서 들어갔는데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제목이었다면, 이른바 낚인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만큼 실망스러운 일도 없다.

   멋진 제목이란 반드시 수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드는, 적당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목, 그것을 멋진 제목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성 들여 쓴 글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맨 처음이자 맨 마지막 도구, 그것이 바로 제목인 것이다.




   제발 내 마음을 받아 달라며 하룻밤에도 열두 번을 고쳐 쓰던 연애편지의 첫 문장. '사랑합니다, 우리 당장 사귑시다.' 그런 표현으로 시작해 성공에 이른 연애를 아직 보지 못했다. 낡고 촌스럽고 유치하더라도 ‘영희 씨, 오늘은 달이 참 밝군요’로 일단 시작하자.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우선 다음 줄을 읽어보자. 상대를,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제목의 역할이다.

   어떻게든 첫 줄을 읽게 만들려는 글쓴이의 열정과, 재미없으니 서둘러 다른 글로 넘어가려는 독자의 냉정, 열정과 냉정을 오가는 그들의 문학적 밀당은 여러분이 멋들어지게 지은 ‘제목’, 바로  '제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좋은 글이 열이면, 멋진 제목은 스물이란 말이다. 멋진 제목을 가진 좋은 글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Image by LEEROY Agency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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