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섯 살, 큰아버지 열세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처지가 비슷했던 이웃 소작농과의 사소한 다툼이 화근이었다. 그가 홧김에 휘두른 몽둥이에 맞고 자리에 몸져누운 지 사흘 만에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빈농貧農의 초라한 마지막이었다.
장남인 큰아버지는 예상치도 못한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제대로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와 아직 어린 두 동생까지, 모두 네 식구의 생계를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묘墓에 뗏풀이 앉기도 전에, 같은 동네 사는 유 씨劉氏 집을 찾아가 머슴살이를 자청했다. 한 달 품삯은 보리쌀 두 말이었다. 노동의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도 시원찮은 것이었지만, 저간의 형편이 손바닥 보듯 뻔한 가난한 마을에서 열세 살 어린 소년에게 그보다 더 나은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것이라도 있어야 네 식구가 끼니 굶는 일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허락을 받아낸 큰아버지는 새벽 동이 트기 전부터 해거름 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처럼 열심히 일했다. 매일 아침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는 또래들의 놀림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도 없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끝자락에, 전쟁에 진 일본이 제 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읍내 만세 대회에 다녀온 주인집 둘째 아들 양식陽植 아재가 늦은 밤을 좇아 큰아버지를 조용히 불렀다.
“종민아, 인자 그만 머슴살이 때려치우고 내랑 같이 부산 가자. 니는 머리가 똑똑하니까 거기서 일하면 금방 큰돈을 벌 수 있을끼다.”
다른 가족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큰아버지는 주저 없이 그러마고 했다. 몇 해, 아니 수십 해 동안 머슴살이를 한다 한들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는 형편. 어차피 죽고 사는 건 예나 거기나 똑같을 것이니 기왕에 고생할 것이라면 팔자에 없는 돈이라도 만져보자.
집을 떠나는 날 아침에야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할머니는 동구 밖까지 달려 나와 통곡을 하며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이 굳어버린 큰아버지를 끝내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열다섯 살의 큰아버지는 이제 겨우 열 살에 불과한 고모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희순아, 오빠는 돈 벌러 간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엄마 말 잘 듣고, 종빈이 잘 돌보고 있어라, 알겠제?”
부산의 허름한 여관 구석방에서 사흘을 하릴없이 궁싯거리다가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마침내 양식 아재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낡긴 했지만 꽤나 큰 중앙동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뜻밖에도 머리가 노랗고 코가 커다란 외국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이 군복 차림이었다. 큰아버지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뒷날 알게 된 것이지만 그곳은 일본의 패전과 때를 맞추어 한국에 진주進駐한 미군들이 주둔군 사단 본부로 이용하고 있던 터였다. 어떤 연줄을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양식 아재는 그곳에서 부대의 필수 물자를 출납 관리하는, 꽤나 힘 있는 자리를 금방 꿰찼고 처음 작정한 대로 큰아버지를 자신의 조수로 둔 것이었다.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자기 이름만 겨우 쓸 줄 알았던 큰아버지는, 대신 남보다 눈치가 빨랐고 머리도 영리했다. 양식 아재의 조수로 두어 달 신나게 일하던 중에 금세 미국인 부대장의 하우스보이 Houseboy가 되었고, 곧 ‘종민’ 대신 ‘브라운’이라는 멋진 이름도 얻게 되었다. 큰아버지의 거무튀튀한 피부가 그 작명의 이유와 맞닿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열세 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하느라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것임을 그들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임기를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부대장은 큰아버지에게 자신을 따라 미국으로 같이 갈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눈에 밟혀 그 환상적인 제안은 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임 대장이 부임한 직후에 부대는 부산 중앙동에서 강원도 원주로 사단 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큰아버지는 단 며칠이라도 고향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가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훨씬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하찮은 일자리 하나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며 뻔질나게 사무실을 드나드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향집에 다녀올 생각을 접은 대신, 어쩌다 편지를 쓰는 양식 아재 옆에 서서 안부 몇 마디를 덧붙여 달라 부탁할 뿐이었다.
신임 부대장 존슨은 큰아버지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이것 봐, 브라운.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금金으로 바꿔서 보관하라구. 너희 나라는 여러 가지로 아직은 불안하니까 말이야.”
사실 큰아버지는 그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똑똑한 미국 사람의 조언이니까 그것이 무조건 옳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월급을 받거나 가욋돈이 생길 때마다 큰아버지는 요령껏 그것들을 전부 금으로 바꾼 다음, 혼자만의 장소에 몰래 숨겨두었다. 그러기를 서너 해, 어느새 꽤나 많은 금이 큰아버지의 비밀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도 사고 논도 사자.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자.”
일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전했을 때, 양식 아재는 물론 부대장도 화를 내며 극구 반대했지만 향수병으로 고생하는 큰아버지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원주를 떠나던 날, 부대장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큰아버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고향 마을까지 가는 동안에 행여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 즉시 부대로 돌아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일요일 하루를 더 쉬고 가라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토요일 늦은 오후에 서둘러 작별을 했다.
유월의 계절은 벌써 초여름을 향하던 참이었다. 집을 떠난 지도 벌써 오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스무 살 청년이 된 큰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고향 마을 소나무 아래로 달음질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출발한 기차는 한낮이 지나서야 겨우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배를 타기 위해 부산으로 가려면 동대구에 내려서 기차를 갈아타라고 군복을 입은 승무원이 말했었다. 그것이 더 빠를 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방을 메고 승강장에 내렸을 때 큰아버지는 역사驛舍의 분위기가 전에 없이 심상찮음을 느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군인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보따리를 들고 등짐을 진 사람들의 모습도 여기저기 쉽게 눈에 띄었다. 철모에 총까지 갖춘 완전 군장 차림의 몇몇 군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기들 앞을 지나는 서로에게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그냥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이겠지. 애써 무시한 채 기차 시각을 확인하려는데 누군가 큰아버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돌아보았다. 대위 계급장을 단 사내와 그의 부하로 보이는 젊은 군인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신분증 좀 볼까?”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달리 신분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부대 출입증을 꺼냈다. 낚아채듯 그것을 받아 든 대위가 큰아버지를 힐끔거렸다.
“자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부산을 거쳐 고향에 가는 길입니다. 왜 그러세요?”
“고향? 가방에 뭐가 들었지? 검사를 좀 해도 될까?”
가방 안에는 금과 약간의 돈이 들어있었다. 큰아버지는 잠시 긴장을 했지만 스스로 당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순히 가방을 벗어 건넸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양식 아재나 부대장에게 전화를 걸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가방을 열어본 대위는 역시나 큰아버지의 예상대로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큰아버지는 대위가 의심 가득한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가방 속의 내용물에 대한 자조치종을 먼저 설명했고, 원주의 부대명部隊名과 부대장의 이름, 양식 아재의 연락처, 그리고 자신이 담당했던 일 등을 말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대위는 앞서와 달리 편안한 목소리로 큰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래, 그 정도면 이것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 것 같군. 필요하다면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면 되겠지. 그런데 임군, 큰 문제가 있어.”
큰아버지는 대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제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빨리 부산 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임군, 오늘 새벽에 말이야.”
“……”
“북한군이 쳐들어 왔어. 전쟁이 났단 말이지. 자네, 스무 살이지? 자네는 지금 당장 입대入隊를 해야겠어. 전시戰時에는 입대 영장 없이도 징집이 가능하니 소란 피우지 말고 협조해 주게.”
“네? 이, 입대라니요? 그게 무슨...”
큰아버지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대위의 곁에 섰던 군인 둘이 성큼 다가와 큰아버지의 양팔을 억세게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순간,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두 동생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속을 알 리 없는 매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