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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Oct 14. 2022

환생 일기 (2)

시공의 오솔길



   아무런 답이 없는 것에 실망했는지 강아지는 혼잣말하듯 투덜거렸다.

   “하긴, 환주님께서 주신 정수를 마셨을 테니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겠지.”

   역시나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도대체 환주님은 무엇이고 정수는 또 무엇일까? 사부달, 삼천 년, 환주님, 정수…

   강아지는 입을 꾹 다물고선 아까처럼 앞을 응시했다. 실룩거리는 까만 코가 꽤나 촉촉해 보였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 무한無限의 공간에 있다는 사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 겨우 그 정도를 이제 막 자각하던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강아지 한 마리가 사람처럼 말을 건네는 지금의 상황이 나는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역시나 강아지였다.

   “아참, 그렇지! 우선은 그렇게 해야겠어!”

   강아지가 한 발 다가오며 말했다.

   “사부달, 너는 무형 정령이라서 아직은 말을 못 할 테니 내가 도와줄게.”


   무형 정령? 낯선 단어가 또 등장했지만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갑자기 강아지가 나를 향해 앞발을 쭈욱 내밀었다. 그리고는 장난감 공을 잡듯 두 발로 나를 감쌌다. 그 순간, 내 주위가 지금의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으로 덮였다. 이상한 느낌이 잠시 스쳤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함이 내 주위를 천천히 에워쌌다. 동시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빛 덩어리로부터 뼈가 삐죽삐죽 자라고 근육이 슬슬 붙었으며 길게 뻗은 핏줄 위로 살갗이 덮이기 시작했다. 그것과 함께 머리통이 쑤욱 밀려 나왔고, 뽑혀 나오듯 팔다리가 생겼으며 눈, 코, 입, 귀와 손가락 발가락이 자라났다. 물론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할 머리카락과 털도 빠짐없이 솟아올랐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빛은 결국 심장 속 깊은 곳에 자리잡았다. 그 빛을 두고 여태껏 '마음'이라고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으로는 보고 듣고 냄새까지 맡을 수도 있었지만, 유독 말만은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자, 사부달. 이제 눈을 떠봐.”

   강아지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풀로 살짝 붙던 종이가 떨어지듯 눈꺼풀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찌익 하고 났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전에 즐겨 쓰던 표현을 빌자면,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일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사고가 나던 그날 아침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안경도, 옷도, 신발도, 심지어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도 원래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뀐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있는 곳이 끝을 알 수 없는 무한無限의 암흑 공간이 아니라 어느 한적한 산길, 그지없이 조용한 오솔길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선한 바람이 불었고, 새 소리도 들려왔다.


   “아니, 어떻게 이런…?”

드디어 나에게서도 목소리가 나왔다.

   “할할할.”

   웃음소리에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강아지는 마치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신기하지? 첨엔 다들 그래. 아,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지. 네가 기억을 못 해서 그런 것이지만…”

   기억을 못한다는 것은 결국 처음 겪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결국엔 내 몸 여기저기까지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느낌은,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다시 태어난 걸까? 이것이 말로만 듣던 환생이라는 것일까?


   강아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부달. 신기하지? 그러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잖겠어?”

   맞는 말이었다. 너무 고마워서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래. 고맙다, 강아지야…”

   고맙다는 뜻을 전하려고 손을 불쑥 내밀었는데 강아지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야! 사부달!”

   “응? 왜?”

   강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민 손이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강아지가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화가 잔뜩 묻은 어투였다.

   “너… 왜 반말이야?”

   “뭐, 뭐라구?”

   난처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책이었다.

   “정수를 마셔서 기억이 지워졌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반말은 아니지. 너랑은 적어도 육만 살은 넘게 차이가 나는데!”

   육만 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화를 내는 강아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얼핏 송곳니가 보이기까지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수습을 해야 했다. 그건 영업의 기본이다.

   “그, 그럼 제가… 존댓말을, 하면 될까… 요?”

   강아지는 팔을 풀고 몸을 돌리더니 길가의 소나무 등걸을 소리나게 걷어찼다.

   “그리고 강아지가 뭐야, 강아지가!”

   호칭에 대한 불만인 듯했다. 하지만 적당한 대안代案이 즉시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뭐, 직전 생生에서는 인간들이 나를 루시라고 부르긴 했지만. 사부달 너는 그냥 편한 대로 불러.”

   존댓말을 써서인지 말투가 약간은 누그러졌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옳지, 그거면 되겠구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 선배님?”

   그 말에 루시가 홱 돌아보았다. 금세 입꼬리가 한껏 올라다.

   “뭐어어? 선배님?”

   “네, 루시 선배님. 저보다 육만 살이나 많으시고, 또 이렇게 저를 도와주시니까…”

   “와아, 선배님이라구? 그거 좋다. 선배님? 마음에 든다, 할할할.”


   루시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강아지를 선배라고 부르는 것은 내게 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신입 사원 시절, 내 위로는 강아지보다도 못한 선배들이 많았다. 술을 먹으면 개가 되거나, 술을 먹지 않으면 강아지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 개들 역시 지극히 단순했다.


   루시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곧 내게 말했다.

   “자, 사부달. 그럼 이제 출발하자. 혹시나 늦으면 환주님께서 노여워하실지도 몰라. 물론 쉽게 화를 내는 분은 아니시지만…”

   “알겠습니다, 선배님.”

   루시가 뒷짐을 진 채로 앞장을 섰다. 나는 서둘러 보폭을 맞추었다. 숲 속 사이로 오솔길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 위로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당장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루시와 나는 걷고 또 걸었다. 해는 지지 않았고 달도 뜨지 않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것으로 미루어보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고, 아쉽게도 잠시 기대했던 환생은 아닌 것 같았다.


   걷는 속도를 가늠해보니 무한의 암흑 공간을 이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정차 KTX만큼이나 빨랐다. 결국, 내가 존재하는 곳은 변함없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초행길을 지루해할까 싶어서 경험 많은 루시가 나로 하여금 몸을 되찾은 느낌이 들도록 해 주고, 내친김에 배경까지 바꿔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루시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사나흘 정도가 지난 듯했다. 루시는 걷기 시작한 이후로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혹시나 화가 난 걸까 궁금해서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면, 뒷짐진 두 발아래의 꼬리가 정신없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또다시 두고 온 루이가 생각났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얼른 기분 전환을 해야 했다.

   “저, 선배님.”

   “왜?”

   혀를 날름거리며 루시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왜 사부달이라고 부르시는 건가요? 혹시, 그게 제 원래 이름인가요?”

   “아냐. 원래 이 공간, 환계換界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름이 없어. 이름이란, 그저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의便宜 때문에 만든, 그들만의 초라한 약속인 거지.”

   “그럼 사부달이라는 것은?”

   루시는 재빨리 발을 뻗어 길가의 코스모스 하나를 꺾었다. 그것을 입에 물고서 말을 이었다.

   “사부달은 넉 사四, 아닐 부不, 이를 달達. 쉽게 말해 네 가지에 이르지 못했단 뜻이야. 네 가지란 바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말하는 것이거든. 인간계에서 환계로 오는 존재들은 거의 대부분이 네 가지에 통달하지 못한 상태야. 만약 그랬다면 인간들이 말하는 이른바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것이고, 성인들은 이곳이 아닌 천계天界로 바로 가게 되지. 또 다른 시공時空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니?”

   꽤나 유식한 강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하, 그런 뜻이었군요. 말하자면, 사부달은 죽은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군요?”

   “정확해. 그런데 사부달, 너는 인간계에서의 이름이 뭐였어?”

   “진우, 진우가 제 이름이었습니다.”

   “진우? 너 멋진 이름 가졌네, 지니우스. 여기에도 그 이름 있어. 진우, 고귀하고 위대한 자여.”

   “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였다. 루시는 아마도 주인의 무릎에 앉아 미스터 션샤인을 애청했음이 틀림없다. 머쓱해진 루시가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나는 내친김에 궁금한 것을 모두 물어볼 작정이었다.

   “선배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환주님을 만나 뵈러.”

   “환주님요? 그분은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지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루시가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뒤로 휙휙 지나가던 풍경 동시에 멈추었다. 또 화가 난 건가 싶어 내가 했던 말을 속으로 급히 되짚었다.

   “진우야.”

   “네, 선배님.”

   “오랜만에 환계에 오다 보니 걸으면서 말하는 것이 조금 힘드네? 그러니 말없이 걷거나, 아니면 네가 날 업고 가면 대답하기 수월할 것 같은데…”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어리광도 심한 개였다. 하지만 궁금증을 풀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등을 돌려대기도 전에 루시가 먼저 내 어깨에다 두 발을 걸었다. 손을 허리에 받쳐 루시가 뒷발로 버티기 좋게 만들었다. 루시가 또다시 혀를 날름거렸다. 꼬리는 풍차처럼 빙빙 돌았다.

   “아이 좋아, 신난다. 진우야, 궁금한 것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렴.”

   신기하게도 루시의 체중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깃털보다 더 가벼웠다. 이미 영靈이 되어 버려서 그런 거라고 추측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루시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나는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잠시 멈추었던 풍경은 천천히 뒤로 밀려다.

   루시는 내 등에 업힌 채로 신이 나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우야, 네가 전생에 뭐였냐 하면 말이야, 궁금하지? 할할할할......"


(계속)




* Image by Jo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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