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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pr 06. 2021

죄송한데, 오십입니다

자꾸 좀생이가 되어 갑니다


각자 쇼핑 체제를 구축하기 전까지는 우리 부부 역시 백화점에 갈 때마다 심심찮게 다투었다.


사랑에 눈멀었던 연애 시절엔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방귀를 트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백화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이, 서로의 잘잘못에 대해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제3호 법정으로 변하곤 했다. 여자라고 통칭統稱해선 안될 일이지만 특히 내 아내의 쇼핑은 언제나 아나바다의 무한반복이어서, 모든 남자를 대변代辯하고픈 나는 당최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아까 들렀던 매장에 다시 가서

 : 나 어때? 하며 백 번도 넘게 또 입어 보고

 : 바로 사면될 것을 굳이 마다하고

 : 다시 올게요 하며 아까 그 매장으로 또 간다.


지긋지긋한 냉전이 되풀이되는 것에 지쳤던 우리는, 그래서 전투력과 의지를 완전完全 소진한 몇 년 후에야 겨우 의미 있는 타협점을 찾았다. 그것은, 일단 백화점에 도착하면 각자 쇼핑을 자유롭게 한 다음, 애당초 정해진 시간과 약속했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단, 내가 구매한 것에 확신이 없거나 상대가 검토해줄 필요가 있다면 그때에 한해서 매장을 함께 재방문한다.


이것을 우리 부부는 쇼핑 민주화民主化라고 부르며, 결혼 생활 이십 년 동안 최고의 업적이라 자부했다.




어쨌든 그날도 그렇게 나 혼자만의 민주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새롭게 출시된 건담 프라모델이 마음에 들어 넋을 잃고 구경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매장 직원이 갑자기 내게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그런다.


"죄송한데, 오십입니다."


본능적으로 네? 하고 자리를 비껴 그냥 돌아서는데 갑자기 물음표 하나가 내 머릿속에 둥지를 튼다. '죄송한데? 죄송하다니, 뭐가? 저 직원은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나름의 보기들이 저요, 저요 하며 꼬리를 문다.


습관

저 직원의 언어 습관은 무조건 ‘죄송한데’로 시작한다.

착각

다른 사람이 저 직원에게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나로 착각한 것이다.

실수

착각에 덧붙여, 다른 사람에게 가격을 잘못 말해주고, 나에게 정정하는 것이다.

경제력

내가 그것을 사기엔 행색이 너무 초라해 보여 미리 가격을 알려준 것이다.




"죄송한데 오십입니다. 죄송한데 오십입니다."


내가 계속 중얼거리자, 결국 아내가 한마디 했다. 오십이 뭐가 죄송해? 육십은 어떡해, 그럼? 곧 풀버전을 듣고 나더니 아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신경 쓰지 마."


그렇다. 당연히 ‘신경 쓰지 마’가 정답이다. 그냥 그랬겠지. 아니면 습관이든지 착각이든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죄송한데’의 이유는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여태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내 꼴이 더욱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나와 관계없는 사소한 것들이 자주 마음에 담기고, 그냥 넘겨버릴 일을 굳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담아 두며, 심지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것조차 나 혼자 여러 날을 넘겨 두고두고 되짚는 버릇이 생겼다. 분명 전에는 안 그랬다. 누가 뭐라든 내 방식대로,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남의 시선, 남의 말, 그리고 남의 판단이 자꾸만 발에 밟힌다.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건 아니다 싶어 이유를 찾다가 결국 제일 만만한, 나이 탓을 해 본다. 바야흐로 오십 인 거다. 스스로 봐도 이런 좀생이 같은 염려가 꼴 보기 싫다 싶을 때, "죄송한데, 오십입니다."는 오히려 내가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변명인 것 같다. 정답은 결국 알 수 없었지만 두루두루 쓸 수 있는, 꽤 괜찮은 변명거리를 얻었지 싶었다.


오십 버릇, 백살까지 간다. 자신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스스로 알고 있는 자신의 나쁜 습관과 옳지 못한 행동은, 더 늦기 전에 빨리 고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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