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종근 아저씨를 위하여
옆 반 현수와 광성이가 퀴즈왕이 되었다는 소식은,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도 그야말로 빅뉴스가 되었다.
그것이 더욱 관심을 모았던 것은, 우승까지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둔 다른 학교 육 학년 아이들을 멋지게 물리친 다음, 내리 3연승을 하여 이른바 역전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백점, 이백 점, 그리고 삼백 점까지 파죽지세로 연승을 달리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동네 어른들은, 현수와 광성이를 칭찬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새가 없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드디어 우리 동네에서도 서울대 판검사가 나올랑갑네. 어디 판검사 뿐이가, 하바드도 우습제. 하바드? 그건 뭐꼬? 응, 미국 서울대. 근데 왜 차인태가 없노? 부산 방송이라 그렇나? 이 사람아, 그건 고등학생들 나오는 장학퀴즈고. 그럼 얘들은? 얘들은 국민학생 나오는, 퀴즈로 배웁시다 아이가. 그것도 모르고 본 거가? 뭐 아무려면 어떻노? 퀴즈왕이 된 걸로 충분 하제.
나는 은근히 심통이 났다.
‘퀴즈를 배웁시다’의 답을 맞혀보면 내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삼백 점은 늘 식은 죽 먹기였다. 분명 국산사자도 내가 더 잘하고, 음미체도 내가 더 잘하는데 그깟 퀴즈왕쯤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짜증 나게 한 건 우리 반 희정이다. 지조 없는 그 희정이 고것이 3반까지 가서, 현수한테 찰싹 달라붙어 퀴즈왕, 퀴즈왕 하며 아양을 떠는 꼴이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결심했다. 퀴즈로 배웁시다에 나가자. 보란 듯이 삼백 점을 받아서, 퀴즈왕이 되어서 그래서 인기와 사랑을 빨리 되찾자. 1983년 유월은 그렇게 비장한 각오와 함께 시작되었다.
다음날, 선생님께 퀴즈로 배웁시다에 나갈 것이니 추천서를 써 달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누구랑 나갈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주저 없이 말씀드렸다.
“명수랑 나가겠습니다.” “왜 하필 명수야?” 선생님은 미덥지 못하다는의외라는 듯 되물으셨다. “가장 친한 친구고, 어차피 문제는 제가 맞힐 거니까 명수는 옆에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선생님이 대답 대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졸지에 러닝 메이트로 지목된 명수는 그날 고맙다며, 울었다.
곧 다가온 토요일, 선생님의 추천서를 들고 초량동에 있는 KBS로 갔다. 방송국 입구에 커다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퀴즈로 배웁시다 예선 참가자는 옥상으로 올라오세요.’
조계식 아나운서와 김모세 아나운서를 직접 봤다며 싱글거리는 명수의 팔을 잡고 한달음에 옥상으로 올라갔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얼추 이백 명은 넘어 보였다.
두시가 되자 새마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올라오더니 우리더러 바닥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문제를 불러주면, 각자 가지고 온 추천서 뒷면에 정답을 적으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스무 개였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정말 쉬운 문제들이었다. 다른 이의 답지를 힐끔거리는 아이들도 간혹 있었다. 시간이 지난 탓에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래도 한 문제만은 아주 또렷하다.
케이비에스를 영어로 쓰시오
일주일 즈음 뒤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방송국이라며, 다음 주 수요일 녹화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동네방네 자랑하러 다녔다. 예선에 통과했음을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나와 명수를 불러내신 다음, 반 아이들 앞에서 박수를 쳐 주셨다. 조금 쑥스러웠다.
광성이와 현수가 우리 반으로 와서 나름의 요령을 알려 주었지만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렸다. 희정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가 무슨 책을 가져와서 저녁마다 읽어주면, 내가 답을 말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시사 상식 책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일주일이 그렇게 금방 지났다.
수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명수와 버스를 탔다. 방송국에 도착하자 까만 모자를 쓴 수위 아저씨가 우리를 막았다. 퀴즈로 배웁시다에 출전하러 왔다 하니, 다시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건물 1층 모퉁이를 돌아서자 큰 철문이 나타났고, 문 위로는 녹화장이라는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머리에 큰 헤드폰을 쓴 아저씨를 만나, 출석을 확인하고 나무 층계로 된 대기석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우리는 네 번째 차례였다. 이윽고 스튜디오의 불이 꺼지고, 귀에 익은 음악이 들리자 그제야 내가 방송국에 왔음이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했다. 명수는 덜덜덜 떨었다. 내가 명수의 손을 꼬옥 잡았다. “떨지 마라 인마, 쪽팔린다.”
환한 조명 아래로 드디어 왕종근 아저씨가 나타났다.
잠시 후 어디선가 “제이, 명수,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고, 조명 아래의 간판 뒤에서 기다렸고, 음악 소리가 들렸고, 왕종근 아저씨가 반겨주었고, 우리는 학교 소개를 했고, 이미 백 점을 맞은 상대편 아이들과 인사를 했고, 옆에 앉은 아줌마가 문제를 읽었고, 저쪽 아이들이 부저를 눌렀고, 점수판은 토끼로 채워졌고, 다음 문제가 나왔고, 토끼 한 마리가 다시 채워졌고, 내 눈앞은 핑핑 돌고, 명수는 덜덜 떨고, 나도 떨고, 명수도 떨고, 나도 돌고.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왕종근 아저씨의 말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탈락이군요. 다음 기회를 기대해 볼게요. 제이, 명수 어린이, 안녕히 돌아가세요.”
우리는 결국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하고 탈락했다. 빵점이었다. 나름 한이 맺혔던 걸까.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의 출제 문제는 생생하다.
1. 태극기 깃봉의 꽃은 무슨 꽃일까요?
2. 오른손잡이 야구선수는 배트를 잡을 때 오른손이 위로 갑니다. 그럼 왼손잡이는 어떤 손이 위로 갈까요?
3. 다음 중 3대 영양소가 아닌 것은? ①탄수화물 ②지방 ③단백질 ④칼슘
4. (스패너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 도구는 무엇일까요? 했는데 명수가 냅다 ‘몽키!’하는 바람에 NG.
씁쓸한 기분으로 무대 뒤 대기석으로 돌아오니, 언제 왔는지 엄마가 있었다. 반나절 일을 마치고 급히 달려오신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는데, 엄마를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엄마가 괜찮다고, 잘했다고 안아 주셨다. 명수도 그 옆에서 우리 엄마 손을 잡고 울었다.
녹화가 끝나고 명수와 나는 KBS 사무실로 갔다. 참가상이라며 동화책 한 권씩을 받았다. 책을 나눠주는 아저씨가 그랬던 것 같다. "빵점 받아도 상관없다. 그냥 열심히 공부해라."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명수와 나는, 빵점이라고 놀림받으면 어떡하나 걱정부터 했다. 학교에서야 그렇다 쳐도 동네 할배들이 우리를 두고두고 놀릴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셨던 것일까? 다행히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가 출연한 것이 방송되기로 한 며칠 전인 유월 삼십일부터 정말 특별한 방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 동네에서는 빵점으로 탈락하는 우리의 방송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특집 방송을 보며 명수와 내가 끌어안고 울었던 것은, 단순히 만남의 감동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