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야, 소금 뿌려라
그는 ‘알고 지내는’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사이에 불과했다.
몇 년 전, 지인知人의 소개로 우연한 자리에서 명함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그 이후로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자주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어찌 보면 그것이 그의 처세술이긴 하겠으나, 나와 특별한 이해관계도 없고 딱히 공유할 접점도 없는 지라, 내가 먼저 그에게 연락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첫인사를 나누던 날, 식당 직원을 대하는 무례한 말투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전방前方의 모든 것을 향해 자동으로 구현되는 자율 욕설 장치 때문에, 다시는 만나서는 안될 사람으로까지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전화가 오면 적당히 둘러대거나, 있지도 않은 약속을 핑계로 불편한 만남을 극구 피하곤 했는데, 다짜고짜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만은 나로서도 당최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늘이 그랬다.
그래도 지인의 체면이 있는 탓에 마냥 퍽퍽하게만 대할 수는 없어서,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건네는데, 앉기가 무섭게 그가 그런다.
“백만 원으로 사람 구별하는 방법, 알려 드릴까요? 궁금하지요?”
아니. 전혀 궁금하지 않다. 절대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내 대답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관계를 확인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이죠, 우선 문자를 보내는 겁니다. 야, 나 지금 백만 원이 필요한데 좀 도와주라, 이렇게 말이죠.”
그의 말은 이러했다. 백만 원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지인들에게 보내면, 회신에 따라서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 사람의 ‘종류’를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회신이 온다고 치자.
계좌 번호 알려 줘
이 경우는 의심의 여지없이 앞으로도 쭈욱 친하게 지낼 사람이다. 이런 답을 받으면, 즉시 연락을 한다. 아, 괜찮아. 방금 해결했어. 정말 고마워. A등급.
일단 기다려봐. 서둘러 알아볼게
이 때는 우선 조금 기다려 본다. 그리고 돈을 마련했다고 연락이 오면, 위와 똑같이 회신을 보낸다. 야,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에게서 구했다. 정말 고마워. 계속 관계를 유지할 사람이다. 하지만 B등급.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이것은 앞의 케이스와 조금 다르다. 이후로 아무 말이 없다가 이삼일 즈음 지난 뒤에 다시 연락이 먼저 와서, 그때 필요하다던 돈은 어찌 되었냐 물으면, 그저 잘 해결되었다 답하는 것이다.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으나 그렇게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 C등급.
야, 그 나이 되도록 백만 원이 없냐? 나 돈 없어. 잘 해결해 봐.
이런 인간은, 이후로 상종할 필요가 없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이 천냥이면 말이 구백 냥이랬는데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 냥, 아니었나? 하여튼) 립 서비스조차 못하는 인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F등급.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생각이기 이전에 어디선가 우스갯소리를 듣고 온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렇게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하는 것은, 본인도 꽤나 공감을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이 되니 나중엔 점점 불쾌해졌다.
“통화를 그냥 하면 되지, 왜 다시 전화하라고 메시지를 보내요?”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그 자리를 끝낼 수 있었다. 그가 돌아가고 난 다음, 나는 정말로 기분이 찜찜했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事情이 있는 것이다.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사정, 여유가 있어 흔쾌히 빌려주는 사람의 사정, 빌려주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사람의 사정. 그런데 그것을 근거로 사람의 관계를 저리 두부 자르듯 쉽게 나눈다고? 그저 그의 농담을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이려니, 억지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 또, 쓸데없이 복기復記하는 ‘오십병五十病’이 도졌다. 이제 나의 친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돈을 부탁하는 전화가 오면, 나는 그걸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하기 싫은 사람 만났더니 이런 쓸데없는 두통거리만 생겼다. 어머니 같았으면 진작에 소금을 뿌렸을 일이다. 말 그대로, 짜증 지대루다.
좋은 사람들만 만나도 시간이 부족한 오십이다. 관계가 많음을 자랑하지 말고 이젠 관계의 깊이를 헤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