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Apr 14. 2021

아이 원트 라코스테 투어

은밀하게 창피하게


제목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했다면, 당신은 이미 생존生存 영어의 달인입니다.




아내는 영어를 잘한다. 아니,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꽤 유창하다.


아내는 결혼 전,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했다. 유학이 아닌, 본사에서 현지로 파견한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체류했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그러니까 비非영어권 국가,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이었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로 생활한다는 것, 그것은 영어를 꽤나 실용적이며 자기 주도적, 그리고 현지 친화적으로 만든다. 영어인 듯, 영어 아닌, 영어 같은 그런 영어. 아내의 영어가 그러하다.


어쩌다 아내가 외국 친구들과 통화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듣다 보면, 저런 말이 과연 있나 싶은 단어와, 저렇게 말해도 과연 알아듣나 싶은 어법이 섞여 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절대 지적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에게, ‘당신은 영어를 정말 잘하는구나’라고 칭찬하는 것으로 나의 등짝과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


반면, 나는 무역회사인 종합상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 누구나 영어는 당연한 기본이었고, 외국어를 두 개, 세 개씩 하는 선배 동료들도 즐비했다. 사료 곡물과 수산물을 취급했던 내가 담당했던 지역 역시, 비非영어권 국가인 중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이었다. 그래서 나의 영어 또한, 실용적이며 자기 주도적이고, 그리고 현지 친화적이다. 아내와 나의 영어에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 마틴 Martin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마틴은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미국인이다. 한국 생활이 벌써 12년을 넘은 탓에 마틴의 우리말은 이미 꽤나 유창하다. 하지만, 나의 부탁으로 우리 부부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마틴이 기꺼이 우리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 준다. 마틴은 한국어로 말하다가 표현이 어려운 부분에서만 영어를 하고, 우리 부부는 영어로 말하다가 역시 어려운 부분에서는 마틴의 도움을 받거나 그냥 우리말로 한다. 어쨌거나 그날도 평소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아내가 깔깔거렸다. 갑자기 시작되는 아내의 웃음은 언제나 나를 긴장시킨다. 아내가 툭 던졌다. “아니 오빠,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해야겠던데?” “내가? 왜?”


아내의 말은 그러했다. 옆에서 듣다 보니 예를 들어, 학교, 스쿨 School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빙 둘러서 내가 표현하더라는 것이었다. 아니, 뜻만 통하면 됐지, 그게 어쨌다고? 뜬금없는 지적에 공연히 부아가 났다. 질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습관을 문제 삼았다. “당신은 말이야, 말할 때마다 유노, 유노! 대체 유노 You know를 몇 번이나 쓰는 거야? 동방신기야? 쳇.” 그러자 아내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그렇게 해서 또다시 제47차 부부 정기공방전定期攻防戰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그 날은 내 혀가 작두를 탔다. 몇 차례의 어법 공격과 단어 방어 끝에 내 쪽으로 판세가 거의 기울어진 참이었다. 궁지에 몰린 아내가 씩씩대다가 갑자기 그런다. “아니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태국, 벌써 잊었나 보지?” 순간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내의 뒤집기에 또 졌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2002년 가을, 우리는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가이드가 없는 자유 여행이었지만 우리 모두 외국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관광 국가답게 태국의 웬만한 곳에서는 영어가 잘 통했다.


하루는 아내가 원래 일정을 바꿔서 색다른 곳, 즉 악어 투어를 해보자고 했다. 아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 나는, 즉시 안내 데스크로 갔다. 컨시어지 담당 직원에게 나의 계획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핵심적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악어가 영어로 뭐였더라?' 직원은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 잠시 머뭇거리던 참에 마침, 딱 좋은 단어가 확 떠올랐다. 그렇지!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이 원트 라코스테 투어!"

그러자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하, 악어 투어! 베리 굿! 노 프라블럼!"


악수를 하고 막 돌아서는데 아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아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가득했다. 평생 나를 따라다닐, 아킬레스의 칼이 그 날 그 순간부터 번득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례지만, 라코스테가 악어 아닙니까? (출처:구글)


더 늦기 전에 영어 공부를 하자. 통번역 어플이 있어도 사람이 직접 말하는 것만 못하다. 성문기본영어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런 젠장, 라코스테라니. 이불아, 너 오늘 좀 맞자.


매거진의 이전글 백만 원으로 사람을 구별한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