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엔 서울경기 같은데
물론 아내는 직장인이었고, 결혼 후에도 한동안 회사를 다녔다.
출산이 임박하여 휴가를 신청한 아내가 그랬다. “출산 휴가 끝나면 직장을 그만두려고 해요.” 간肝의 사이즈가 콩만큼 작았던 나는, 당장에 우리 집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 염려되었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선 아이 낳은 다음에 천천히, 처언처언히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의 염려를 돌려서 전할 뿐이었다.
아내의 논리는 이러했다. 우리 생활수준에 맞는 최저 수입만 유지되면 당장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탁아託兒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비용이라든가, 가족 간의 갈등, 부부간의 말다툼,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아이의 정서적 결핍 등이 더 염려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본인의 급여가 사라지는 만큼은 경제적으로 손실이겠지만, 다른 예상 가능한 문제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점에선 오히려 훨씬 더 이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아이를 하나만 낳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이의 육아는 아내에게 그만큼 소중하다고도 했다.
내가 우회적으로 아내의 생각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아내는 확고했다. 회사에서 주어진 출산 휴가를 완전히 소진한 다음, 어느 날 아이를 안고 출근하더니 사표를 내고 돌아왔다. 사장님의 특별 격려금까지 받아왔단다. 그래서 아이를 회사에? 그리고 아내는 내게 또다시 말했다. “염려하지 말아요. 조금 아껴서 살면 별 문제없을 거예요.”
아내는 가정을 잘 꾸려주었다. 물론 예상치 못한 경조사와 미리 알려주지 않는 살림살이의 고장, 그리고 부러울 때가 있는 남들의 씀씀이가 때로는 말 못 할 아쉬움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신경 써서 잘 키워준 탓에 아들은 그 흔한 중2병도 없이 사춘기를 잘 넘겼다. 그런 만족과 감사는 아내가 직장을 계속 다녔을 경우 벌어왔을 화폐의 총액, 그 이상의 것이었다.
또한 의상 전공자답게 아내는 직접 옷을 짓기도 하고, 패션 감각이 남달라서 값싼 옷 몇 벌 만으로도 정말 기막히게 멋진 코디를 척척 해 내었다. 준비해 주는 대로 입고 집을 나서려다가, 왠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때는, 아내가 귀신같이 내 속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한마디. “저녁때 돌아와서 이야기합시다.” 물론 저녁에 돌아와선 그 날 하루 종일 내 옷차림에 대한 남들의 칭찬을 아내에게 전하는 것이 정해진 일상이긴 했지만.
절약이 몸에 밴 아내가 최근, 전에 없이 이것저것 사기 시작했다. 물론 값비싼 물건들은 절대 아니다. 그저 평소 같았으면 그냥 보고 지나쳤거나,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들이 요즘은 집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런 날이면 혹시나 싶어 아내의 인스타그램을 슬쩍 들여다본다. 역시나.
사진을 찍느라 족히 열 번은 넘게 위치를 다시 고쳤을 소품과 장신구들 아래로 여지없이 태그가 붙어있다. 내돈내산. 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이란 뜻이려니.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순수하게 내돈내산은 아니지.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내가 산 것이니까, 남돈내산이지. 안 그래?
나는 조용히 댓글을 달아본다.
@arin*** 황여사, 말은 정확하게. 내돈내산이 아니라 남돈내산 아닐까. 남편 돈으로 당신이 산.
입력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빨리 댓글을 지워야 한다.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 차라리 어떤 아재가 한 말이라며 서울경기라고 쓸 걸 그랬나? 아니다. 늦었다. 우선은 빨리 숨자.
서 서방님이 힘들게
울 울면서 벌어온 돈으로
경 경제권을 틀어쥔 아내가
기 기분 좋게 쓰는 것
아내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은,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이나, 여성 우월주의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못난 남자 하나 만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살아준 아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그저 최소한의 감사일뿐이다. 아내의 내돈내산이 반가운 것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